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33)


     전세중 시인, 재경 죽변출향인
봄이 왔다. 햇볕사이로 실바람이 살랑거린다. 내 사무실 앞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주변의 벚나무는 움이 트는데 한 나무는 감감무소식이다. 지난겨울에 말라 죽었는가 싶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시원치 않아 직원에게 이 나무 죽은 것이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갈색 빛이 도는 거친 나무껍질 때문인지 메말라 보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조그만 것이 꼬물 그리며 움트고 있는 것 아닌가. 어두움을 뚫고 돋아나는 빛이 이렇게 선명할까. 살아있어 다행이다. 초록 잎 새 사이로 순백색의 꽃이 활짝 피었을 때의 아름다움을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생명이 있는 꽃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알고 보니 언젠가 다른 곳에서 지나쳐 보았던 이팝나무였다. 아래에서 쳐다보는 것 보다 사무실에서 내려다 볼 때 푸른 잎과 하얀 꽃잎이 더 아름다웠다. 내가 출퇴근길에 지나는 문정동 로데오거리에도 가로수로도 심어져 있었다. 푸른 잎과 하얀 꽃을 보는 재미는 열흘이상 이어졌다. 푸르면서도 순백의 빛은 내게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자연과 인연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가. 나는 자연과 함께 문학에 인연이 닿아 그 속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관조하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지만 글쓰기가 쉽지 않다. 

좋은 수필 한편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흔히 말하기를 잘 다듬어진 문장, 선명한 주제와 적절한 짜임새, 체험과 철학을 절묘하게 혼합한 글을 좋은 수필이라 한다. 수필의 작법을 말하는 것처럼 쉽게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리석게도 나는 읽어서 재미가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글과는 아직 먼 듯하다. 오늘도 나는 시적 정서와 감흥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하여 하루의 삼분의 일을 할애하며 산다.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헬렌 켈러가 생각난다. 그녀는 태어나 열병을 앓고 난 후 열아홉 달 만에 시각과 청각을 잃었다. 그녀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인간승리의 표상이 되었다. 23살 되던 해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출간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필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그녀의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때로 내 마음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집니다. 그저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눈으로 직접 보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하는 문장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사물의 아름다움을 거의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다. 우리는 세상을 가득 채운 색채와 율동의 파노라마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감사할 줄 모르고 산다. 갖지 못한 것만 갈망하는 그런 존재가 아닐는지. 

빛의 세계에서 ‘시각’이란 선물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 단지 편리한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빛의 세계를 상상으로 그리고 있는 헬렌 켈러의 간절한 기도가 떠오른다. 그녀는 광명의 나날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표를 작성했다.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오래도록 숲을 산책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렵니다. 거기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저녁놀까지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합니다.

둘째 날,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전율어린 기적을 바라보겠다. 장엄한 빛의 장관은 얼마나 경이로울까요. 나는 이날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일에 바치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켈러의 사흘간의 ‘환한 세상 계획표’는 언제나 듣고 볼 수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얼마나 무심코 흘려버리며 사는가.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도 느낄 줄 모르고 표현할 줄 모른다. 

헬렌 켈러는 우리에게 암시적인 주문을 하고 있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 운명에 처해진다면, 여러분의 눈은 이전에 결코 본적이 없는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눈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사용할 것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겁니다. 당신의 눈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을 어루만지고 끌어안을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새로운 미의 세계가 당신 앞에서 문을 열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고 산다. 

나는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인가.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고 새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다. 이순이 넘은 나이에도 안경을 쓰지 않고 책과 신문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헬렌 켈러가 단 사흘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고 염원하는 세상을 나는 매일 보며 사는 부자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