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IMF사태로 다니던 직장이 문을 닫으면서 실직자가 되는 바람에 졸지에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처음 어린 학생들로부터 선생님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면서도 묘한 가슴 떨림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학원 밖에서 아이들이 선생님이라 부르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의식하게 된다. 선생님이란 호칭의 무게가 조심스러운 까닭일 것이다. 학원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주로 ‘쌤’이라고 하는데, 소심하고 고리타분한 얘기만 자주하는 나를 아이들은 가끔 ‘샌님’이라 부른다.

사전적 의미로 샌님이란, ‘가난하면서도 자존심만 강한 선비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 로, 아이들이 나의 정체를 꿰뚫고 있는 것 같아 뜨끔하다. 그러나 한편 이희승의 수필 '딸깍발이'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으쓱하기도 하다.

샌님이란 말의 어원이 '생원(生員)님' 이라는 것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생원님은 전국구인데 반해, 샌님은 서울의 남산골에 국한되어있는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왜 하필 남산골 생원님만 샌님일까. 지금까지 많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모두가 짐작일 뿐 ‘이거다’하는 자료는 없다. 의견 제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내 짐작도 여기에 슬쩍 얹어본다.

조선 말엽 한양에서는 양반들의 학술 모임이자 친목단체인 시단(詩團) 몇 있었는데,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한 노론(老論) 벌열층(閥閱層)이 중심인 ‘북사(北社)’. 요즘 서울에서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북촌이다.

낙산(駱山)과 동대문 일대에 사는 선비들의 모임인 ‘동사(東社)’,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少論) 가문의 양반이나 남산 일대에 가난한 선비들이 중심이 된 남사(南社), 그리고 청계천의 광통교(廣通橋) 일대에 몰려 사는 역관(譯官)들과 육의전 거상(巨商)들의 모임인 ‘육교시사(六橋詩社)’가 바로 그것이다.
 
보아도 그림이 나온다. 정치계의 중심은 당연히 노론 벌열층의 북사였고, 정치적으로 북사와 어깨를 견줄 야당은 동사, 그들과 어디까지나 시문(詩文)에만 경쟁상대인 가난뱅이 남사, 그리고 육교시사는 경제력과 유행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흔히 박규수를 비롯한 북촌의 노론 개화파들을 요즘의 ‘강남 좌파’에 비교하곤 하는데,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었던 조선에서는 어림없는 얘기다. 경제력으로 보면 역관과 거상들이 모여 살았던 광통교 일대가 ‘강남’이었다.

‘가난하면서도 자존심만 강한’ 남산골 샌님들은 당연히 남사(南社) 소속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내 짐작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산골 샌님의 직업은 선생이었고, ‘샌님’은 ‘선생님’의 다른 표현이다. 가난한 남산골 생원들은 소공동, 광통교 일대 부자들의 자식을 가르치는 과외선생이었다.

남사(南社)의 리더였던 추금(秋琴) 강위(姜瑋)같이 유명한 선생은 역관들이 모셔다가 별도의 숙소와 강의실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이름 없는 남산골 선비들은 광통교 일대 부잣집을 돌아다니며 과외를 했다. 그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은 비록 출신은 중인이나 남산골 샌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자였다. 그들은 당연히 유행의 첨단을 걸었다. 선생님을 빨리 발음하면 샌님이 된다. 더 줄이면 쌤이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에서 강남 부자 아들 권상우가 가난한 과외선생인 김하늘이 입은 옷을 보고 비꼰다. “촌티 나게 옷이 그게 뭐냐? 지난번에도 그 옷 입었지? 과외 유니폼이냐?” 비단옷에 가죽신을 신은 광통교 부잣집 도련님은 남산골에서 온 과외선생의 나막신이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딸깍발이는 그들이 보는 과외 구두는 아니었을까. 부잣집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자존심만은 잃지 않았던 남산골 생원님. 그들이 샌님이고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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