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소설 <칼의 노래>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김훈 작가는 원래 유명한 수필가였다. 그의 독특한 문체와 빼어난 필력은 문단에서도 이미 대가(大家)로 인증하는 바였고, 박래부와 더불어 오랫동안 한국일보에 문학기행을 연재하여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20몇 년 전에 <풍경과 상처>라는 기행 산문집을 펴냈는데, 그 안에는 ‘울진 후포’에 대한 기행문도 실려 있었다. 
 
대가의 시선으로 본 후포는 과연 어떤 풍경일까 잔뜩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가 실망하고 말았다. 아무리 뛰어난 안목을 지닌 김훈이라도 그 역시 도회(都會) 사람이구나 싶었다.

이명원은 김훈의 문체를 두고, ‘아득한 뱀을 연상하게 만드는 문장들은, 언어적 페티시즘’이라 했는데, 당시 김훈의 후포를 읽고 내 느낌이 딱 그랬다. 아득한 문장으로 아득하게 과장된 글이라 생각했다.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해본다.

‘해안선을 바짝 끼고 달리는 큰 산맥이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윽박질러, 빠뜨려버릴 듯 바닷가까지 밀어붙였고, 거기까지 치달아 내려온 검은 산맥의 그 사나운 앞발들이 가파른 수직 경사를 이루며 물속으로 잠겨드는데, <중략> 삶의 배면(背面)을 태백산맥이 쾅쾅 못질해 막아버렸고 삶은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해풍과 파도에 쓸리우고 있다.’ <중략>

‘산맥이 삶의 배면을 차단하고 있지만, 내륙 쪽으로 눈을 돌려도, 산맥의 커다람과 무서움은 그 전체의 윤곽을 보여주지 않았고, 커서 보이지 않는 검은 산맥은 삶의 너머에서 흉흉한 소문처럼, 그러나 확실하게 버티고 있었다.’

<풍경과 상처>를 처음 읽었던 1993년만 해도 김훈의 후포는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보다 정확한 묘사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간다.

그 때는 저 검은 산맥 속에도 골골이 스며든 수많은 민초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산은 삶의 터전을 차단하는 산맥이 아니라, 삶의 현장이었고 보호막이었다. 후포에서 보이는 커다랗고 무서운 산이라 해봤자 해발 400미터 남짓한 마룡산인데, 기슭동네 꼬마들이 방과 후에 소 풀을 뜯기며 놀던 놀이터에 불과했었다.

꼭대기에 올라서면 동해바다가 비단처럼 펼쳐지고, 뒤로는 수십 개의 산골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 산자락마다 아이들이 소떼를 몰고 나와 풀을 뜯기는 그림 같은 풍경도 볼 수 있었다.

그 산자락 밭떼기에 선친(先親)을 모신 지 스무 해가 한참 넘었다. 부끄럽게도 벌초 한 번 제대로 못해드렸다. 밭을 맡아 농사를 지으시던 마을 어른께서 대신해주었는데, 올해부터 밭을 묵히는 바람에 고향 친구에게 어려운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흔쾌히 청을 들어준 고마운 친구는 선친의 묘소를 찾지 못하겠다고 전화를 해왔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에서 불과 몇 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밭가에 있는 묘소마저 숲이 가로막아 접근조차 못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딱 1년 만에.

이제는 김훈 작가에게 항복하지 않을 수 없다. 민초들 삶의 보호막이었던 산은 참말로 검고 무시무시한 산맥이 되고 말았다. 무섭게 우거진 숲은 산골마을을 포위하며 사람들에게 길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두었고,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도회로 도망쳐버렸다.

문득 생각해본다. 원래 그 숲은 소들의 몫이다. 길로 숲을 가로막고 소들에게 숲을 돌려주면 어떨까. 소고삐 대신 뿔에다 GPS를 감아달아 숲을 먹어치우게 할 수 없을까.

열 마디도 넘게 사람 말을 알아듣고 산골 꼬맹이들 생떼까지 받아주던 그 소들에게 이어폰을 부착하면, 거대한 산맥을 점령하여 순하게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고속도로를 달리는 무인 자동차 보다는 통제가 훨씬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여전히 촌놈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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