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아내가 TV드라마를 보며 훌쩍거린다. 좀체 없던 일이라 궁금해서 화면을 슬쩍 봤더니 <응답하라 1988>이 방영되고 있다. 나는 한 편도 본 적은 없지만, TV에서 <응답하라> 시리즈는 방영할 때마다 엄청난 인기와 화제를 몰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더불어 시청자들로부터 추억의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렇더라도 드라마에 훌쩍거릴 것까지 있나 싶어 아내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무지개꽃 피던 시절인데 뭐가 슬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쳐다보는 아내에게 나 혼자 지니고 있던 동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세상엔 아름다운 것도 많지만, 노을 진 산골 마을에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풍경만큼 따사로운 광경도 드물다. 겨울에 울진의 어느 산골 꼬맹이들은 산으로 들로 온종일 쏘다니며 놀다가, 마을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를 때쯤 제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내 어린시절 기억에는 고무신을 벗는둥 마는둥 마루로 뛰어올라 라디오를 켠다. ‘어린이 왈츠’와 함께 어린이방송이 시작된다.
“꽃과 같이 곱게 나비 같이 춤추며 아름답게 크는 우리, 무럭무럭 자라서 이 동산을 꾸미면 웃음의 꽃 피어 나리”

1988년 서계동에 위치한 출판사에서 주임으로 진급할 때 쯤 서울올림픽이 시작되었다. 외국 손님들이 김포공항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던 첫날, 9시 종합뉴스는 “11일 하오 7시40분 쯤 비가 개면서 김포공항 일대에는 일곱색깔의 아름다운 무지개가 저녁 하늘을 수놓아 장관” 이라는 멘트로 시작했다. 동료들에게 승진 턱을 내던 중에 뉴스를 보면서 문득 어린이 왈츠 2절을 떠올렸다.

“꽃과 같이 곱게 나비 같이 춤추며 아름답게 크는 우리, 무럭무럭 자라서 이 강산을 꾸미면 무지개 꽃 피어 나리”

고무신을 신고 라디오로 어린이방송을 들으며 자란 세대들이 무럭무럭 자랐고, 정말로 이 나라도 무지개꽃이 핀 것 같았다. 미상불 그때부터 황금기(黃金期)가 펼쳐졌다. 아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1988년에서 1997년까지인 이유도 호황의 시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TV에서 과소비는 죄악이라는 공익광고가 방영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개인적으로도 그 정점에 해당하는 <응답하라 1994> 즈음에 결혼을 했고 이듬해 아들도 하나 생겼다. 룸살롱에서 득남(得男) 턱을 냈다. 그 때는 손바닥만한 출판사 편집실도 룸살롱에서 회식을 하던 시절이었다.
“나 몰래 룸살롱을 다녔어? 아름답게 크던 어린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룸살롱을 다녔단 말이지? 무슨 동화가 기.승.전. 룸살롱이야.”

마지막으로 룸살롱을 간 것도 <응답하라 1997> 즈음이다. 그 후로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그해 겨울에 IMF 경제위기를 맞으며 직장도 없어지고 퇴직금도 사라졌다. 제법 규모가 있는 입시미술학원을 시작했던 아내도 빚더미에 앉게 됐다.
“듣고 보니 정말 그 때가 무지개꽃 피던 시절이 맞네.”

이튿날 저녁, 아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어린이 왈츠에 2절은 없어. 인터넷을 다 뒤져봐도 무지개꽃이 피고 어쩌고 하는 건 없다고! 그 가사 자기가 지어냈어?”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여시아문(如是我聞)인데. 내 머리에서 그렇게 좋은 가사가 만들어질 리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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