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39)


나에게는 전영중이라는 고향 친구가 있었다. 그는 나와 다르게 장난기가 많았다. 한밤중에 산양 가죽 털을 뒤집어쓰고 “나는 산양이다” 포효하며, 내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너무 놀라 혼비백산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상급 학교에 진학을 못한 나에게 도회지에 나가서 함께 공부를 하자는 제안을 했던 속 깊은 친구였다. 그의 제안을 수락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삶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었던 친구였다.다.

어느 날, 시골에 사는 그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구리로 만든 큰 놋대야를 내가 보관하고 있는데, 아마도 자네 집 물건인 거 같군, 어서 찾아가게나.” 갑자기 기억에도 없는 놋대야를 돌려준다고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오래된 내 물건을 다시 돌려준다는 말에 무척이나 고마웠다. 놋대야의 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렴풋이 기억났다. 옛날 우리 집에 그런 물건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동네에 흔하지 않은 물건이어서 애착이 갔다.

그릇의 재료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 놋대야는 쓰임새가 다양하였다. 손님이 왔을 때는 세수를 하기도 하고, 곡식을 담기도 하였으며, 잔치가 있을 때에는 소리를 울리는 악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플라스틱 그릇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릇 중의 팔방미인이었다.

1976년 내가 울진을 떠나 서울에 터를 잡았으니, 어느덧 30년이 흐른 셈이다. 우리 가족은 서울로 상경할 때 혹시나 고향으로 다시 내려갈 수도 있으려니 생각하고 가재도구를 그대로 두고 왔다. 가끔 고향 집에 내려가 추억이 묻어 있는 살림살이들을 찾아보면, 없어진 물건이 많았다. 놋그릇쯤이야 모른 척 하고 지나면 그만일 텐데 주인에게 돌려주겠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다.

전화를 받고 불현듯 친구 생각이 났다. 그는 불행하게도 군복무 중, 비가 오는 날 전봇대에 올라갔다가 전선에 감전되어 순직하였다. 그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인물이 잘 생긴 편으로 무척 성실하였고 믿음직한 친구였다.

그러나 내 주변 친구들 중에는 못믿을 친구들도 더러 있다. 몇 해 전, 급전이 필요하다는 친구에게 어렵게 구한 돈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약속 날자가 지나도 연락조차 없었다. 그는 계속 미루다가 아주 조금씩 갚았다. 물론 내가 그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빌려준 사람과는 입장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신용을 우선으로 여기고 살아왔다. 이제 그가 더 급한 일로 나에게 부탁을 한다면, 들어주겠는가. 신용은 돈 이상 값지다. 아예 돈을 빌려주지 말거나, 빌려 줄 때는 못 받을 돈이라 생각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하다고 생각을 바꿨다.

스마프폰 아이콘처럼 소통이 가벼운 오늘날 사회 놋그릇은 내 마음의 선물이 되었다. 아내와 나는 친구의 아버지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고민을 하다가 내의를 한 벌 사서 보내드렸다.

친구의 아버님으로부터 고맙다는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그는 공직 생활을 하느라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는데, 고향 집 짐을 정리하다가 낯선 놋그릇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청렴했던 삶이 들여다보이는 듯하였다.

요즘 어떤 세상인가. 남의 물건이 탐나서 슬쩍 훔치거나, 사기를 치거나, 강도짓을 넘어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할 때 물건이나 금전을 쉽게 빌리지만, 갚겠다는 약속은 사뭇 다르다. ‘돈은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 는 속담과 같이 빌릴 때와 갚을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끼며 산다.

정직한 마음만큼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도 없다. 내가 잊고 살았던 물건을 돌려받은 것은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오래전 잃어버렸던 물건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손길이, 나의 인생 노트에 삶의 교훈으로 적혀있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