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40)


“우리가 4,000킬로미터를 달렸네요.” 동유럽 8개국을 10일간 여행하고 난 마지막 날 가이드가 버스 미터기를 보면서 한 말이다. 1일 400킬로미터 거리를 달렸으니, 하루 평균 6~7시간은 차를 탔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여행이 끝날 무렵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아내는 여행 떠나기 하루 전 날 대상포진에 걸렸다. 등 뒤로 붉은 반점이 보여 곧장 병원에 달려가 약을 지었다. 일주일 치였다.

아내가 의사에게 내일 여행 떠난다고 말하자 의사는 쉬어야 된다고 했다지만, 마음먹었던 일이라 우리는 계획했던 대로 떠나기로 했다. 아내의 여행 의지가 강했고,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랄뿐이었다.
 
나는 대상포진에 걸린 적이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인 줄은 잘 모르겠지만, 경험자들은 상당히 아프다고 했다. 아내는 진통제를 먹어가면서 10박 12일간 일정을 35명의 일행과 똑같이 소화해 나를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아내가 그다지 건강한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갑상성 저하증도 있었고, 뛰는 맥박도 약해 조금만 움직여도 쉬 피곤을 느끼는 체질이라서 6개월마다 정기 검진을 받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는다. 장기여행에 신경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내가 건강 체질이 아닌데다가 환자인 상태에서 극한상항에서도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이 주는 새로움이 아니었을까. 매일 다른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10시간 만에 독일 프랑크플루트 공항에 도착했다. 첫째 날은 독일 분단의 역사를 보여주는 베를린장벽과 브란덴부르크 문을 보았다.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 추모비를 넓게 조성한 것은 독일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과거를 반성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독일의 과거 속죄는 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독일인들은 이 엄청난 사건이 한 독재자의 비뚤어진 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나친 국수주의가 빚어낸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라사랑, 조국을 위해라는 말은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은 유럽연합을 리더 하는 국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쿠담 거리를 걸으며 카이저벨헬름교회 일부가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독일은 허름한 외양에 상관없이 붕괴의 위험이 없는 한 그 건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그대로 남겨두고, 그 안에서 문화의 꽃을 피우는 적업을 하고 있었다.

둘째 날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인간은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는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사람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돌아보게 했다. 소금광산에서 무한한 인간의 힘을 보았다. 1500만 년 전의 소금으로 집을 지었다. 소금 2만 톤으로 만든 예배당, 예수와 제자들의 벽화, 조각상, 장신구가 소금으로 빛났다. 

셋째 날 알프스 타트라산맥을 거쳐 자연풍광을 감상하며 헝가리로 이동했다. 헝가리 사람들은 생김새가 왜소하여 우리와 닮았다는 느낌이다. 다뉴브강 유람선에서 노을의 찬란함과 부다페스트 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넷째 날 겔레르트언덕에서 부다페스트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영웅광장에서 밀레니엄 맨 꼭대기에 날개달린 천사 가브라엘의 왼손에는 이슈트반이 로마 교황청에서 받은 왕관을, 오른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있었다. 기독교가 헝가리를 발판으로 크로아티아 등 발칸지역으로 확장된 현장이었다. 성 이슈트반 성당에는 이슈트반의 오른손이 미라로 보관돼 있었다. 부다페스트왕궁에는 십자가를 든 이슈트반의 조각상이 우뚝했다. 

다섯째 날 비엔나로 이동하여 쉔부른궁전, 슈데판대성당, 케른트너 거리, 비엔나 시 청사를 보고 크로티아의 수도 자그브레로 이동했다. 

여섯째 날 크로아티아 폴리트비체 국립공원, 2시간 걸으며 숲 안에서 숲을 보고, 호수를 보고,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꼈다. 수정처럼 맑은 호수에 숲과 하늘이 담겨있었다. 청동 오리가 지나가며 그들을 지웠다. 폭포가 끝임없이 계단처럼 흘러내리며 장관을 이루었다.

일곱째 날 슬로베니아로 이동하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포스토니아 동굴을 관람했다. 종류석 문양이 다양하고 화려하여 경이로운 자연미술관이었다. 블레드성에서 바라 본 호수와 주위 경관은 김일성이 반한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멀리 알프스산맥의 잔설이 보였다. 짤스부르크로 이동하여 게트라이더 거리를 걸으며 모차르트 생가를 방문했다. 

여덟째 날 호수지대 짤스감머굿에는 모차르트의 외가가 있는 곳으로 호수가 아름다웠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 바라보면, 호수가 군데군데 보이고 가지런한 산맥이 줄기차게 달리는 모습이었다. 다음은 체코 프라하로 이동했다.

구시가지 시청사 남쪽부분은 천문시계로 장식되어있고 정시만 되면, 시계 기둥에는 죽음과 허영 터키인과 바보를 비유한 인형들이 서 있고 해골이 줄을 당겨 종을 울렸다. 맨 위쪽의 창문이 열리고 예수의 열두 제자들이 한 사람씩 지나면서 얼굴을 보여주었다. 정시에 가까워지니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체스키크롬프로성을 둘러보고 프라하 야경을 감상했다. 

아홉째 날 블파다강을 가로지르는 카를교,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다리 위를 걸었다. 수백 년 전 조각상은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시내를 조망하는 프라하성을 오르는 길가에는 삼성로고가 펄럭이고 있어 한국기업들의 활동상을 볼 수 있었다. 도시계획이 잘 된 중세의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 유럽의 박물관. 그래서 매년 1억 명의 관광객이 찾는 것일까. 

열째 날 중세마을 독일 로텐부르크를 찾았다. 시청사 주위로 다양한 색상으로 개성있게 지어진 건축물이 돋보였다. 30년 전쟁 당시 로텐브르크 시장의 무용담을 인형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특히 느끼는 점은 마을마다 도시마다 그 중심에는 늘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성소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삶이 이루어졌고, 기독교에 근원을 두고 학문과 예술, 건축이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것이다. 

여행이 끝날 무렵 아내의 몸통 옆구리에서 등 뒤쪽으로 물집이 띠 모양으로 난 대상포진은 수그러져 더느듯 했으나 붉은 반점은 그대로였다. 여행 중에 낙오되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 졸였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감사했다.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시차 적응과 긴장이 풀리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침내 이겨내었다. 그렇지만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대상포진 후유증은 10개 월 간이나 지속되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나이 많으면 장거리 여행은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이 뛸 때 여행을 하라고 하지만, 늘그막에 떠난 여행으로 후유증을 호소한 지인들을 여럿 보았다. 인생의 목적을 돈으로만 평가하는 이들의 삶은 오히려 무미건조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젊은이여 여행을 자주 떠나라. 가슴으로만 느끼지 말고 기록을 남겨라.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것이 희미해질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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