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41)


우리가 ‘큰 일을 할 때 방심은 금물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정신을 집중해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계획을 세우면 몇 번이고 생각하고 잘못된 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1997년 개봉된 영화『타이타닉』은 세계 최고의 흥행작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 무렵 평소 극장을 잘 찾지 않던 나도 관람하였고, TV로도 몇 번 더 보았다.

영국 사우샘프턴 항을 출항한 타이타닉 호 침몰의 정확한 원인 규명을 두고, 100년이 흐른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1912년 4월 10일 오후 12시 15분 타이타닉 호는 영국 사우샘프턴 항을 출항해 다음날 아일랜드의 킹스타운에 정박해 승객을 더 태웠다.

대부분 신대륙인 미국으로 가던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타이타닉 호는 2,206명을 태우고 뉴욕으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마지막 항해가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월터 로드가 쓴 타이타닉호의 비극에 따르면, 배에 타고 있었던 총 2,206명 중 구조된 사람은 703명 뿐이고 나머지 1,503명이 사망했다.

정말이지 가슴 아픈 세기의 사건이다. 5만 2,000톤의 타이타닉 호는 배 길이가 약 268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선박이었다. 배에는 호화객실과 고급 레스토랑은 물론 수영장, 체육관, 도서관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떠다니는 궁전’이라고 불렀다.

사고가 났던 14일 오전에는 원래 해상사고가 날 것을 대비해 구명보트 타는 훈련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선장이 승객들의 불편을 이유로 취소시켰다. 타이타닉 호에 준비된 구명보트에는 모두 1,178명이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구조된 사람은 703명 뿐이었다. 구명보트는 남아 있었으나 타지 못한 것이다.

선장 경력 26년의 에드워드 스미스는 타이타닉 호의 첫 향해가 끝나면 은퇴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본래 뉴욕 도착예정일인 17일보다 하루 일찍 도착해, 자신의 은퇴도 멋지게 장식할 요량으로 23노트의 빠른 항해를 명령했던 것이다.

출항 당일 북대서양에 빙산이 떠다닌다는 전문을 6통이나 받았지만, 평소 자주 있던 일로 치부해 버렸다. 주위를 지나던 다른 선박들이 보낸 경고 무전을 바쁘다는 핑계로 무시해 버렸다.

14일 밤 망루에 있던 두 사람은 큰 빙산을 발견하고 놀랐다. 다급하게 알렸지만, 그 거대한 타이타닉호의 속도를 늦추기엔 너무 늦은 때였다. 결국 그날 밤 11시 40분쯤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타이타닉 호는 빙산과 비끼듯 충돌하고 말았다.

6cm 두께의 강판과 300만개의 리벳으로 조립된 튼튼한 몸체는 암초가 할퀴고 지나가도 끄떡없을 이중바닥이었다. 16개나 되는 방수격실, 일정 수위에 오르면 자동으로 닫히는 문은 그 시대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었다.

갖가지 안전시스템을 갖춰 ‘불침선不沈船’으로 불릴 정도였다. 타이타닉 호는 배 밑의 수밀격실水密隔室이 4칸까지 물에 차도 침몰하지 않도록 설계됐으나, 빙산과 충돌하면서 바닷물이 수밀격실 5칸까지 들이쳐 버렸다.

결코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타이타닉 호는 충돌 후 2시간 40분 만인 15일 새벽2시 20분에 선체가 두 동강 나면서 4,000m 깊이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첫 출항이 마지막 항해가 된 셈이다.

무엇이든 완벽할 수는 없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져 완벽하다는 타이타닉호도 마찬가지다.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배가 위험해역에서 너무 빨리 항해했다는 기본적인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타이타닉호가 당시 영국 기선 캘리포니안 호 처럼 야간운항을 중단했다면, 조류나 신기루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이타닉 호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악의 사고를 가정하여 운항을 했어야만 했다. 신도 침몰시킬 수 없다는 자만에 사로잡혀 결국 역사상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낸 것은 빙산이 아닌 바로 사람의 방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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