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명 룡 집필위원

 

지난 번 글에서도 적은 바 있지만, 내 주변사람들에게 가끔 “나는 원시시대를 살아봤어”라고 말할 때가 있다. 베이비부머의 끝자락인 내게 그 원시시대는 지극히 짧아 몇 개의 조각 그림으로 추억하지만, 너무나 강렬하여 이후 내 삶의 틀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선거는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다. 울진의 어느 산골에도 선거 바람이 불어들었다. 농약과 쥐약이 막 보급되던 시절이라 가끔 집안의 업신(業神)으로 여겨지던 집구렁이가 처마에서 떨어지기도 하는 초가집 흙 바람벽에 선거 벽보도 나붙었다.

흙벽에 물풀로 붙인 종이벽보가 제대로 붙어있을 리 만무, 며칠 안 가서 너덜대고 펄럭댔다. 산골 꼬맹이들은 종이벽보를 뜯고 찢어 딱지를 만들어 놀았다. 기호3번 진복기 후보의 ‘카이저 수염’이 접힌 딱지도 있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쳤거나 졸업도 하기 전에 남의 집에 꼴머슴을 사는 경우도 흔하던 시절이었다. 이름이 윤백호였던 형님도 그들 중 한명이었는데 꼬맹이였던 내가 무척 따랐다. 그 백호 형님이 어쩌다 동네 형에게 얻어맞은 일이 있고나서 며칠 후였다.

또래 조무래기들과 무리지어 등교를 하는데, 저 아래 쯤 양복을 말끔히 입은 한 신사가 연신 고함을 지르며 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중학생 두어 명은 서슬이 퍼런 신사에게 잡혀있는데, 언뜻 들려오는 고함소리는 “진복기 누가 어쩌고”하는 거였다.

그 소리가 우리 꼬맹이들에게는 “진복기 누가 쨌어?”로 들리면서, 아뿔사! 진복기 벽보를 누가 쨌더라! 누가 째서 딱지로 만들었더라. 누구랄 것도 없었다. 박정희도 째고 김대중도 째고 진복기도 우리 꼬맹이들이 모두 찢었다. ‘산으로 도망치자’ 하는데, 점차 자세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윤백호 삼촌인데 우리 백호 누가 쳤어?”였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조무래기들은 오금을 조금씩 펴고 가던 길을 걸어 신사에게 붙잡힌 형들 무리로 다가갔다. 양복 신사는 여전히 고함을 질렀다. “윤백호 누가 쳤어!”

조무래기들은 겁을 먹고 때린 사람을 말할까말까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마침 이웃동네 중학교 3학년 형님이 자기는 이 동네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당당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신사는 다짜고짜 달려가 덩치가 자신보다 한참 더 큰 그 학생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너 백호 쳤지! 너 백호 쳤어 안 쳤어?” 이웃동네 형님은 자신 있다는 듯 학생모자를 쓱 벗었다. 그리고는 자기 빡빡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저는 배코 안 쳤는데요.......” 그랬다. 중학교 까까머리들 중에 더러는 이발비 몇 푼 아끼자고 면도날로 배코를 치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그나마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복 받은 사람들이었다. 舊 동독의 실상과 인격의 소중함을 다룬 영화 <타인의 삶>에서 주인공은 동독의 자살률과 정부에서 그것을 숨기고 있음을 세상에 알린다. 지금 북한이 아마 그럴 것이고 우리의 원시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신문에 단편적으로 알려진 그 시절 자살자 숫자는 요즘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1960년 10월 22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7월에서 9월까지 3개월 동안 충청남도에서만 무려 146명이 생활고로 자살했다. 그중 무직자가 81명 농민이 34명이었다. 한편 부산 영도다리에서는 1960년 4월에서 12월 사이 무려 78명이나 생활고로 바다에 투신했다. <출처: 4,19혁명과 웃음>

배코의 에피소드로 즐겁던 그 등굣길에서도 농약을 먹어 리어카에 실려가는 마을 어른을 우리 코흘리개들은 두 차례나 봐야했다. 중학교도 못 마치고 배를 탔던 바닷가 친구들도 바다에서 잃었다. 가난은 그처럼 끔찍했다. 나는 단지 그 끝자락만 봤을 뿐인데도 말이다.


역사에서 정치적 평가가 경제적 평가를 압도한 사례가 드물다. 삶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경제이지 정치적 가치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경제 앞에 겸손해야 한다. (신복룡)와 같은 어려운 말을 시골 어른들은 할 줄 모른다. 경제성장도 반대 측의 주장처럼, 그 시절 정치가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각자의 기억에 각인된 끔찍함이, 어쩌면 다음 차례가 나였을 수도 있었다는 무서움이, 자꾸 1번으로 손을 이끌지 않았나싶다. 이제 그들 숫자가 줄어든 만큼 1번도 줄어들 것이다. 문득 참 착했던 윤백호 형님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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