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국회 ~ 20대 총선까지

 


울진의 국회의원 선거사를 취재하면서 매우 고무적인 발견은 제헌국회 의원선거로부터 15대 선거에 이르기까지 부정선거가 없었다고 한다.

일제 초부터 해방이 되고 3년간 미국정의 지배를 받다가 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을 뽑는 초대 선거 당시 36세의 전영직 후보의 핵심 참모역을 맡았던 임상봉 옹에 따르면, 울진은 자유당 시절의 의원선거에서도 부정선거는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선거를 치를 때 후보자의 능력 조직 자금력 등 3대 요건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당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최근에 들어서는 시민단체의 활동과 매스미디어에 의한 대량 정보유통에 따라 시대 맞춤형 선량이 발굴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우리지역의 48년 초대부터 63년 6대까지의 국선은 특히 사람중심 즉 인맥에 의한 선거였다.

말하자면 조직력이나 자금력, 인물보다는 어느 면에 누가, 어느 부락에 누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그 부락이나 그 문중 사람들이 따라가는 가부장적 권위가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시기였다.

67년 7대 선거로부터 73년 9대 선거는 민주공화당 오준석 의원의 시대였다. 이 시기는 오준석의원이 울진에서 지역구 3선에 이어, 10대 전국구의원으로 진출하여 4선의원이 되어 울진은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61년 5.16혁명을 일으킨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론에 전 국민이 새마을 노래를 합창하던 시기로 여당이라야만 지역 개발이 가능하다는 개발론이 시대를 점령했던 상황으로서 국회의원 선거에 있어서는 조직력이, 특히 여당의 조직력이 큰 힘을 발휘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81년 11대부터 88년 13대의 지역상황은 김중권 의원의 시대였다. 민주정의당이 제5공화국정권을 세운 군부 출신의 권력자들은 구정치인 거의 모두에게 정치활동규제를 가해 정치판에서 내보내고, 참신한 능력있는 인물들을 발굴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울진에는 당시 영덕지원장을 지냈던 40대 초반의 김중권 전 의원이 발탁되었다.

이 시기로부터 5당 4락이라는 풍설이 돌기 시작하면서 자금력이 선거결과를 크게 좌우하는 시대로 들어가 지금은 30당 20락으로 발전 돈이 큰 위력을 발휘하는 돈 선거의 시기가 되었다.

1996년 15대 선거부터는 김광원의원의 시대였다. 지역정서에 힙입어 당선된 그의 3선 기간은 거의 정권을 잡지 못한 야당의 시기로 지역을 위해 많은 일을 하지 못했다. 초`재선 때는 당선은 되었지만, 재판에 계류돼 의욕조차 잃고 시간을 허비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로 관운이 좋은 분이었다. 지역 정서나, 선거과정에서의 행운은 항상 사람이 좋다는 그의 편이었다. 3선의원을 역임했다.

지난번 18대 때는 언론과 권력의 힘이 총체적으로 작용된 선거였다. 공천과정에서부터 선거운동, 선거이후 일련의 사태가 선거결과에 따라 깨끗이 마무리되었다. 초선에 당선된 강석호의원은 임기 초반 3선 의원급의 역량을 발휘했으나, 후반기로 들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현재는 울진은 영양영덕봉화와 함께 4개 지역이 한 개의 선거구에 속해 새누리당 강석호 의원이 18대에 이어 19, 20대 선거에 연거푸 3선에 당선되어 의원직을 수행중이다. 강의원은 초선 때부터 포항정권의 총아로서 배경이 좋아 승승장구 하고 있는 데, 재선 때부터 도지사, 최근에는 당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다.                              <편집자.주>

 


◉초 대 선 거
 울진의 초대선거는 해방 후 신문화와 전통문화가 맞딱뜨린 선거였다. 33세의 김광준 후보와 60세의 전영직 후보와의 접전이었다.임상봉(작고) 옹에 따르면 김광준 후보가 넥타이나 구두를 상징했다면 전영직 후보는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상징했다는 것이다.

김광준 후보는 젊은 나이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사법, 행정고시 양과를 합격한 당시 지역 최고 인재로서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젊은 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전영직 후보는 24세의 나이에 죽변 청년단장으로서 지역 인사들중 유일하게 한일합방 동의 서명을 거부하고 독립금자금을 대주었던 애국지사적 인물로서 당선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가 이끄는 대한독립촉성회 울진지회에서 북부의 전후보와 남부의 온정출신 김수근후보 2인이 출마, 표가 분산됨으로서 전영직 후보가 낙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회에 올라가 헌법기초위원을 지냈을 만큼 탁월한 식견을 지냈던 김광준 후보의 당선은 나라를 위해 잘된 결과라고 회고했다.

◉2대 선 거
 6, 25동란 직전인 50년 5월30일 치른 2대 선거에서는 1대 선거의 재판이나 다름 없었다.

전영직 후보는 원남의 유력자가 김광준 후보에게 돌아서 원남지역에서 참패했고 유림 등 농촌지역의 지지를 받았으나 어촌이나 시장 상인들이 김광준 후보를 지지했으며 노령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미 1선을 지낸 김광준 의원은 전후보를 능가한 세력을 얻었고 특히 경찰등 공무원의 도움을 받기 시작 이때부터 관권선거의 씨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때 63년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진기배씨가 약관 30세의 나이로 출마를 시작해 4번이나 도전하였다.

◉3대 선 거
 6, 25 전쟁 1년 못 미쳐 54년5월20일 치러진 3대 선거에서는 김광준 의원과 함께 자유당 공천경합을 벌였던 울진군 청년단장 출신의 전만중후보가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무소속의 김광준 후보에 득표수 3배차로 대승했는데 실력이나 능력 면에서 김광준 후보에게 훨씬 못 미침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포용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김광준 의원은 반대세력에 대해 정치적 소외를 시킴으로서 민심이반으로 실패했다고 한다. 그리고 1~2 전영직 후보가 극복하지 못했던 시장과 어촌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친화력과 대중연설에 뛰어났던 반면 실력이 출중했던 김광준 의원은 대중연설에는 취약했다고 한다.

◉4대 선 거
 58년 치러진 4대 선거에도 전만중 의원과 김광준 전의원간의 대결이었는데 자유당 정권의 득세에 따라 전만중 후보가 득표수 2배 차이를 내며 무난히 당선되었다.

◉5대 선 거
 4.19가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직후에 일어난 5대 선거에서는 전만중 의원이 후보출마조차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했고, 민주당 공천을 받았던 김광준 후보가 당선 3선의원이 되었다.

이때 김광준 의원의 셋째 동생인 현재 한나라당 고문 김명륜의원이 38세의 나이로 강릉에서 당선되어 형제국회의원이 탄생, 국내 큰 화제가 되었는데 김명륜의원은 사법고시에 패스, 초임 강릉검사를 지낸 수재로서 25세의 나이로 형제가 울진의 이름을 높였다.

◉6대 선 거
 61년 5.16혁명이 있은 뒤 63년에 치러진 선거에서는 2대부터는 4번째 도전한 민정당의 진기배후보가 박정희 대통령의 군부정권이 만든 민주공화당의 김광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을 낳은 선거였다.

특히 경상도 27개 시군에서 진기배의원이 유일한 야당의원으로 국회에 등단 또 한번 울진은 전국적인 관심지역이 되었다.

이때 김광준 후보의 결정적 패인은 잦은 당적 변경이었다. 5대때 민주당으로 당선된 김광준 의원은 민정당으로 옮겼다가 6대 출마에는 공화당으로 공천을 받자 “왔다, 갔다 김광준”으로 널리 전파되며 또 한번 민심을 잃어 이후 정치적 생명이 단절되고 말았다.

진기배 후보는 역대지역 선거사에 있어 전만중후보와 함께 대중연설에 뛰어났다고 한다. 여기에다 “불쌍하다 진기배”라는 구호가 먹혀들어 부동층 동정표가 쏠려 당선되었다고 한다.

 ◉7대 선 거
 7대 선거에서는 1개 선거구의 인구소 하한선이 15만으로 결정되고 찬조연설이 가능했고 돈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선거였다.

당시 울진의 인구는 11만을 약간 상회하여 영양의 4만 인구와 합해 울진 영양 단일선거구가 되어 1명을 뽑았다. 이 당시 울진군에는 유사이래 인구가 가장 많았던 시기로 증언하고 있다.

7대는 11개 정당에서 후보를 내어 우리지역 국선사상 최다의 후보가 경쟁하였는데 영양에서는 이상철 후보 1명이 나왔고 나머지 후보는 모두 울진 출신이었다. 이때부터 장소택 후보가 등장 현재까지 6번째 입후보하여 울진최다 입후보를 기록하고 있다.

김광준 의원의 매제로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은 오준석씨가 투표자 73,393명중 47,731표를 얻어 65%의 절대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8대 선 거
 공화당 정권의 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기 한 해전 치러진 71년 8대 국회위원 선거는 여당의 프리미엄과 새마을 운동 시작에 따른 잘살아 보세의 국가 부흥론이 지역에도 그대로 미쳐 지역 개발론이 득세, 오준석의원이 무난히 당선되었다.

◉9대 선 거
 9대 선거는 1개 선거구 인구 하한선이 20만으로 선거구당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 실시에 따라 울진, 영덕, 청송이 1개 선거구로 되었고 울진에 오준석, 영덕에 문태준, 청송에 박종길 후보가 나와 3개 지역 대결 구도를 형성, 소지역주의에 의한 선거가 되어 후보마다 출신군에서 압도적으로 다수표를 가졌갔다.

그리하여 오준석씨와 문태준 여당 두 후보가 동반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10대 선 거
 10월 유신이후 국회를 해산시켜 9대 선거 2년이 안된 73년 2월에 치러진 선거였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금전을 살포하는 선거로 접어들었다.

이때 오준석의원은 영덕의 문태준씨와 공천경합을 벌이다 유정회 소속의원으로 들어가 4선의원이 되었으며 10대 후보 중 울진출신은 무소속의 김용식 후보 1인이 나왔으나 당선되지 못해 울진에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을 내지 못한 유일한 시기가 되었다.

◉11대 선 거
 5공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 정화법을 만들어 오준석 문태준 황병우씨가 출마하지 못하고 영덕지원장이었던 김중권 후보가 여당인 민정당으로 나와 야당인 영덕 출신의 김찬우 한국당 후보와 함께 당선되었다.

이때는 물론 지역대결의 양상을 띠었으나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의 몰락에 따른 야당표의 결집이 이루어진 선거였다.

◉12대 선 거
 12대에는 지역대결 양상이 재연되었으나 영덕에서 결과를 판정한 선거였다.

김중권 후보는 11대때 보다 영덕에서 약2천여표 더 가져왔고 김찬우 후보는 영덕에서 4천여표 청송에서 3천여표 잃어 낙선하였으며 황병우의원은 잃어버린 김찬우씨표를 받아 당선되는 형국이었다.

◉13대 선 거
 다시 울진군 단일 선거구에 1명을 뽑는 선거구로 환원되었고 김중권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3선에 당선되어 지역에 독보적인 정치인으로 발돋음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 국회 법사위원장을 역임했다.

 ◉14대 선 거
  6공화국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자유당 집권체제에서 치러진 14대 선거는 울진원전관련문제가 돌연변이로 작용 결정적인 판가름을 했다.

4선이 무난할 것으로 예상했던 자유민주당 김중권 의원이 통일국민당의 이학원 후보에게 상당한 표차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김중권 의원의 패인으로 크게 군민원전반대투쟁 외면, 지역구 활동 미흡, 측근 인사들의 관리소흘 등 3가지로 분석되었다.

◉15대 선 거
 15대 선거는 다시 울진 영양 봉화의 복합선거구에서 1인을 뽑는 선거구로 변경 되었고 지역대결의 양상을 보였으나, 11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경북도부지사 출신의 신한국당 김광원 여당 후보와 무당파국민연합의 김중권 후보와의 대결 구도였다.

김광원후보가 약 6천여표 차이로 3선의원 김중권 후보를 누르고 초선에 당선되어 17대까지 김중권 후보와 3번 대결하여 승리하여 3선의원의원의 길을 걸었다.

◉16대 선 거
 2000년 4월13일 치르진 16대 선거는 영양이 분리되어 울진과 봉화 2개군에 1명을 뽑았다. 한나라당 김광원의원이 재선되었다. 봉화 출신의 젊은 박영무 (당시 43세) 단국대 교수가 민국당의 공천을 받아 후보로 출마하여 3명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박 후보는 이중 당적 문제로 후보 자격을 상실하여 결국 김광원, 김중권 양자대결이었다. 김광원의원은 운이 좋았다. 야당 초선의원이었던 김광원의원은 당시, 막강했던 직전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의 민주당 김중권 후보를 맞이하여 승리했다.

당시 울진군수도 민주당 출신 군수였다. 울진에서 약 1천여표를 지고, 봉화에서 약 1천여표를 이겨 19표 차이로 이겼는데, 만약 봉화 출신의 박영무 후보가 후보자격을 박탈당하지 않았더라면 승부가 뒤바뀌었을 가능성이 컸다.

◉17대 선 거
 17대는 5명의 후보자가 출전했지만, 한나라당 재선의 김광원, 민주당 대표까지 지내고 민주당 대권후보로 나섰던 정치적 거목인 무소속의 김중권, 열린우리당 박영무 후보간 사실상 16대 선거 3후보 리턴 매치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치러진 선거로 선거법을 매우 강화하여 공명·미디어선거 원년으로 기록될 만큼 그동안 금품선거가 사라지는 듯했다. 선거 초반 지역정서나 전격적인 선거구 광역화로 김광원의원이 독주할 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역풍 때문에 울진...선거구에서도 언론방송의 여론조사 결과는 열린당 박후보의 지지세가 김광원 후보를 능가할 정도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선거구가 영양, 영덕까지 합쳐져 4개군으로 넓어지고, 한나라당을 박근혜 대표가 맡으면서 지역정서 바람이 불면서 김광원 후보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김중권후보가 무소속으로 울진에서 출마하자, 박후보 지지자들이 대거 김중권 후보쪽으로 이동하자, 결과는 김광원의원이 3선에 성공했다.

16대 때는 박영무후보가 후보자격을 잃어 김중권 후보가 패배하는 결과를 낳더니, 17대 때는 그와 반대로 김중권 후보가 귀향함으로서 박영무 후보가 힘을 써보지 못하는 결과로 나왔다.

 ◉18대 선 거
 18대 선거는 8년 전 2008년 4월9일 실시됐다. 5명이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강석호 후보와 무소속의 김중권 후보의 맞대결 상황이었다. 김중권 후보는 울진에서 약 60%를 득표했지만, 강석호 후보는 영덕에서 무려 78%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전체적으로 약 9천여표의 차이를 내며, 강석호 후보가 당선되었다.

공천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형님공천이니, 낙하산 공천이니, 심지어 김광원의원이 떠나면서 지역구를 강석호 후보에게 팔아 먹었다는 비난여론이 일기도 했다. 선거 과정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형 이상득의원이 포항에서 올라와 지원하는가 하면, 지역 언론 등이 모두 나서 일방적으로 지원하여 강석호 후보에게 잔뜩 힘이 실렸던 선거였다.

선거에 패배했던 김중권 후보측에서는 선거결과는 졌지만, 울진·봉화에서 이겨 사실상 승리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동안의 고향에서의 낙선에 대한 명예를 회복했다고 자위하기도 했다.

◉19대 선 거 

 19대 울진군회의원 선거는 2012년 4월11일 치러졌다. 모두 6명이 출마했으나 재선을 노리는 새누리당의 강석호 후보와 울진출신의 무소속 김중권 후보와의 대결이었다. 당시 강석호 후보의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위원장을 대통령 만들자는 선전이 지역 정서에 먹혀 들었다.

김중권 후보에 대해서는 울진 유권자들의 지지가 강의원 보다 높았지만, 18대 현역의원으로서 지지기반을 다진 강석호 의원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19대 선거에서 강석호 후보는 울진군과 봉화군에서는 김중권 후보에게 뒤졌지만, 영양과 영덕에서 압도적인 표가 쏟아져 승리했다. 영덕에서는 무려 2대 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인구가 많은 울진에서의 패배를 넘어설 수 있었다.

◉20대 선 거

 지난 2016년 4월13일 치러진 울진선거는 새누리당 후보 경선 전까지 볼만한 게임이었다. 3선을 노리는 강석호의원과 울진출신의 전광삼 전 청와대 춘추관장이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기 위한 접전이 팽팽하게 펼쳐졌다.

본사가 실시한 두 차례 여론조사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무응답 층의 지지세와 신인 가산 10%를 더하면, 전광삼 예비후보가 강석호 현 의원의 지지율을 넘어선다는 판세로 분석됐다.

그러나 경선결과는 강석호 의원의 승리였다. 경선결과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강석호 의원의 압도적 승리였다는 여론이다. 전광삼 전 춘추관장은 경제력, 인맥 등 총체적 능력에서 강의원의 적수가 아니었다.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은 강의원의 본선 게임은 수월했다. 18%. 17%를 받은 2명의 무소속  후보들에게 68%라는 득표율을 자랑했다. 강의원은 이제 3선의 여당의원으로서 주민들의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역발전은 물론, 강의원의 정치적 성장도 예약된 상황이다.

                                        /전병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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