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익 (전 재부 울진군민회 총무)


 

옛날에 타향 객지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했다.

1960년대에 부산에서 고향 울진에 가려면 새벽4시 통금해제 싸이렌이 울리고 첫 차를 탄 후, 흙먼지를 쓰며 사고 없이 달려야 평해까지 갈 수 있었다.

그 당시 부산에 울진 사람이 얼마나 살고 있었는 지는 몰라도 서로 인사하다가 고향이 울진이라고 하면, 일가친척을 만난 듯이 반가위하며 무조건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때 부산에는 윤영익, 서광일 등 울진중·고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울진 북부지역 청년들이 모여 ‘연호친목회’를 만들었고, 한상숙, 김병찬 등 평해중 출신들을 중심으로 울진 남부지역 청년 모임이 있었다.

평해 출신의 대연여중 교사인 손병우 선생이 연호회에 찾아와서 남부 청년들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동참할 것을 요구하여 연호회원들은 쾌히 승낙하고, 1972년 초에 울진남북 청년회를 통합  ‘재부 울진군 청우회’ 를 결성하였다.

초대 회장은 황종대, 총무는 이천우를 선출했다.  회원 간의 상부상조 등 친목을 도모하면서 고향을 위한 사업을 연구하다가 울진군 내 초.중학교 대항 배구대회 및 축구대회를 주최하여 10여 년간 개최하였다.

이 행사 때는 울진군청, 경찰서, 교육청에서 적극 후원하였고 경찰서에서는 영덕 울진 경계까지 경찰차가 나와 선도해 주었고, 교육청에서는 각 학교에 참여 공문을 보내고 행사장에는 교육감 또는 장학사가 참석하여 축사도 해 주었다.

이 사업이 중단된 것은 박두영 회장 때 죽변중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대회 결승전을 마치고 시상식 후, 회식 자리에서 울진교육장이 군내에 자체 행사가 많아서 앞으로는 청우회 행사에 후원하기 곤란하다 하여 중단 되였지만 대회 때마다 참가하는 선수와 임원들의 식대와 여비도 전액 청우회에서 지급하였으며 울진군내 전 학교에 배구공과 축구공을 선물하였고, 회원 개인별로는 자기 연고 학교에 많은 물적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업을 하면서 향우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당시 장년층인 장성업, 손순경, 박진규, 황석조 등 백암 친목회 회원들에게 설명을 드려 재부 울진군민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1974.7.16. 군민회 창립을 위한 발기인 회의(임시의장 박하윤)를 하였고, 1974.9.21. 부산진구 초읍동 성지곡 수원지에서 창립총회를 하였으며, 초대 회장에는 근남면 출신 장성업 동영목재 사장을 선출했다.

선출된 장성업 회장과 윤성준 부회장은 기금 조성을 위하여 고향 연고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노력한 결과 많은 기금이 확보되었고, 군민회 운영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77.5.1. 정기총회에서 자천으로 김유석 회장과 김성환 부회장이 선출됐다. 

그런데 그해 9월에 이 회장단은 이사회 결의도 없이 울진 군내 노인들을 모셔놓고, 김유석 회장의 죽변 친구인 오준석 국회의원을 초청하여 성대히 경노잔치를 베풀었다. 그 결과 군민회 기금은 장부상 적자가 되었으며, 그 당시 총무였던 분은 울진에 가서 제10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되었다.

우리 군민회는 순수 고향 사람들의 복지와 침목을 목적으로 한 모임인데, 이런 정치적인 사건이 있는 후 초창기 기금 조성에 노력했던 분들은 분노를 느꼈고, 그 외 회원들도 실망하여 모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군민회가 와해 단계에 있었다.

할 수 없이 초창기 발기인들이 다시모여 창성해운 주식회사 이재철 사장을 설득해서 회장으로 추대하여 1978.6.4. 제4회 정기총회에서 이 사장을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그때 필자도 총무직을 맡게 되었다.

회계장부를 인수 할 때 적자된 부분만 김유석 전 회장이 변제하였으나 기금은 제로 상태였고, 회장이 바뀌었어도 이사들의 불신은 여전하여 성원 미달로 이사회는 항상 유회가 되었으니 의결기구의 마비로 이름뿐인 군민회였다.

재생 방법을 연구한 결과 젊은 층으로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지역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들 신치상, 박규석, 남주종 등 각 면에서 몇 명씩 선별하여 30여명으로 '신우회' 라는 친목회를 조직하였고, 신우회원 전원을 군민회 이사로 추대하여 군민회 이사회 때는 신우회원들만 참석하여도 성원이 되어 이사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80.5.18. 온천동 금강공원 식물원에서 제6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는데, 8개면 2개 출장소에서 차출된 10명의 대의원들이 회장 선출을 한 결과 온정면 출신 아성산업사 이장길 사장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회장은 군민회 활성화를 위하여 열성적으로 회원들을 찾아다니며 참여하도록 설득하고, 이사회 때 회비는 없이 참석하기만을 애원하여 식대 등 모든 경비는 사비로 지출하면서 기금을 모으고 진실을 보이니까 차츰 회원들이 참여하였다.

또 군민회보를 발행하면서 각 면단위와 학교단위의 친목회를 찾아서 연락처를 알리고 군민회원 전부의 연락처를 알리니 서로 모르고 지내던 연고자끼리 만나기도 하고, 총회 때는 서로서로 참석할 것을 독려하여 군민회가 활성화 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장길 회장은 1986.5. 임기만료 후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군민회 고문으로 참여하시니 군민회의 최고 공로자라 할 수 있다.

1974년 군민회 창립을 위해 발기인들이 여러 번 모임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서면로터리 일식집 방자초밥을 하시던 손순경 사장이 장소와 식사 및 음료수를 무료제공 하였다. 1994.4. 장학회를 설립하게 된 동기는 손순경 사장의 부인인 조정순 여사께서 이장길 고문을 통하여 거금 3천만원을 출연했다. 이것을 계기로 회원 및 각 분야의 울진인들로부터 출연금을 모아서 장학회를 설립하였다. 

이때도 필자는 초대 사무국장으로서 장학회 회칙 및 장학금 지급세칙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잘 운영되고 있으며, 기금은 개인이 절대로 유용 못하도록 장치가 되어있고 장학금 지급은 보통자산 범위 내에서 지급하고, 기본 자산은 계속 쌓여 2억 원에 가까우니 재부 울진군민회는 영원히 발전 하리라 믿는다.

돌이켜보면 재부 울진 중.고등학교 동창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무를 하였고, 청우회 총무, 군민회 발기인 및 총무, 장학회 초대 사무국장을 하였던 수십년의 세월이 보람보다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숱한 좋은 일 궂은 일만 있으면 제일 먼저 총무를 찾았고 그때마다 사심없이 성심껏 도와주었던 일들이 보람이고,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 “윤총무 이닌교?” 하며 반가위 해주는 것에 만족을 느꼈다.

끝으로 재부 울진군민회 또는 회원들 개인이 울진군 행사 및 각 면단위의 행사 때마다 수없이 많은 협조를 했지만, 울진군 내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울진읍 월성공원 충혼탑 립시 찬조자 명단에 우리 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졋다. 

평해여고 건립기념 비석에도 여러 명 새겨져 있으며, 울진군회관 입구에도 새겨져 있고, 원남면 3.1독립운동 기념탑에도 우리 회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필자는 형편상 군민회에 참여를 하지 않아서 회원들 기억에서 사라졌고, 이제 내 나이 희수를 넘어 인생 종점에 왔는데 잊혀진 군민회 초창기 역사를 이렇게나마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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