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상 (맘파시 칠관운사 지산)

 

연중 가장 더운 때를 삼복三伏 더위라고 한다. 삼복三伏은 24절후의 하나인 작은 더위라는 소서와 모기가“내소리 없거든 니 아들 거동보아라!”는 처서 사이에 들게 되는 잡절이다.

복날은 6월 22일 하지를 지난 후 셋째 경庚일을 초복이라 하고, 네 번째 경庚일이 중복이며, 8월 7일경 입추가 되는데 이 입추를 지나고 나서 첫 번째 오는 경庚일이 말복이 되는 것이다.

복날은 열흘간격으로 진행되어 20일 만에 말복이 오는 해를 매복每伏이라 하고, 올해같이 중복 지나 말복이 10일이 아닌 20일 만에 오는 해의 삼복을 월복越伏이라 한다. 올해 초복은 7월 17일이었고, 중복은 10일 후인 7월 27일이었으며, 말복은 20일 지나 8월 16일이다.

복伏날의 복伏자는 주인을 따르던 개도 워낙 더워서 움직이지 않고 납작 업드려 있다는 업드릴 복伏자를 쓴다. 개는 체온을 조절하는 기관인 발바닥과 혓바닥을 내밀어 더위를 식히느라 넙죽 업드려 헉헉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삼복에는 귀한 떡이나 노치를 구워 벼논이나 서숙(조)밭, 콩밭에 풍년농사를 들게 해달라고 토지신님께 빌었는데 이를 복제伏祭라 한다.

나는 우리 논과 밭 5곳을 돌며 대표되는 토지 중앙에서 복제를 지냈는데, 싸리나 시누대로 1m 이상의 막대에 길이 30cm, 폭 5cm 정도의 한지 깃발을 묶어 매달아 논둑에서 제사를 지낸 후, 그 떡을 한지에 말아 논밭에 묻고 그 옆에 막대를 꽂았다.

지역에 따라 복제를 지내는 시기가 달랐는데, 집성촌이었던 우리 집안은 주로 초복에 남들보다 먼저 복제를 지냈다. 배고픈 시절 밭에 묻힌 떡은 김이 빠지기도 전에 누군가 곧장 떡을 파가지고 갔으며, 논에 물 묻은 복 떡도 돌아서기 바쁘게 뒤져 가곤했다.

언제부터 이런 세시풍속이 이 땅에 아니 우리 울진에 생겨났는지는 확인을 못했지만, 우리 집안의 복제는 1976년 이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즈음 사라진 복제 문화가 새롭다.

문화공보실 직원이며 아나운서가 특기였던 나는 1973년 들어 권명흠 군수와 같이 울진군 전역을 휴일없이 온종일 마을마다 돌며 IR667벼 권장 가두 홍보 방송을 하고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내병성 강한 다수확 신품종인 IR667(나중에 통일벼 됨)이 확대재배 되면서 복제는 자연스fp 사라지게 되었다.

나락에도 삼복이 있어 모내기 후 초복 때가 되면 나락에 한마디가 생기는데, 이 시기는 초벌 논매기가 끝나는 시기이고, 중복은 나락에 두 번째 마디가 생기면서 두벌논매기가 끝나는 시기이며, 말복은 세 번째 마디가 생기면서 벼 이삭이 싹트게 된다는 과학이 있는 삼복제였다.

삼복에는 일꾼 머슴도 휴일을 주어 힘든 일을 시키지 않았고, <골 메꿈>이라는 영양보충인 보양식을 함께 먹기도 했다. 콩 칼국수, 흔치 않는 떡, 영계백숙, 장어탕, 추어탕 등 평시 음식이 아닌 특식을 이웃과도 나누어 먹었는데, 이를 복伏대림이라고도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백숙이 변해 삼계탕이 대세가 되었으며, 요즈음에는 전복삼계탕도 태어났다. 이열치열이라 해서 뜨거운 탕을 즐겼고, 얼음이 귀한 시절 더위 식힌다고 수박을 먹으며 마을 사람들은 유유끼리 추렴을 했다.

사라지는 복제伏祭와 <골 메꿈>이 변형되어 회사직원이나 경로당에 수박이나 삼계탕으로 위로 하는 곳도 생겨났다. 근간 전국을 여행하면서 알게 됐는데, 뜻있는 사람들이 주민 쎈터 등에 70세 이상 노인들을 모셔 복제 대신 삼계탕 잔치를 열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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