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유난히도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가 절정에 다다랐다. 현재 서울의 온도는 섭씨 36도, 습도는 무려 80%에 이른다.

이글거리는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잔뜩 찌푸린 얼굴을 보면서 시원한 그 무엇을 떠올리다가 고려시대 천재문장가 이규보의 샘물(寒泉)이라는 한시(漢詩)가 생각나 주제로 삼았다.

南北行人暍(남북행인갈) 오가는 행인들 더위에 허덕일 제
寒漿當路傍(한장당로방) 시원한 샘물 길가에서 만났네
勺泉能潤國(작천능윤국) 조그만 샘물이 온 나라를 적시니
再拜迺堪嘗(재배내감상) 두 번 절하고 비로소 맛을 보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사이다’같은 한시다. 그러나 우리말 해석이 자못 어색한 까닭에 그 진미를 맛볼 수 없어 아쉽다. 글을 쓰기 위해 원문을 찾아보니 시중에 발간된 한시(漢詩) 서적이나 인터넷에 게시된 각종 자료들 대부분 위와 같이 번역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발행한 <동국이상국집>의 번역본도 이와 같다. 요즘 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린 한시 해설도 작자의 진의를 오역(誤譯)한 경우를 가끔 보게 되는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번역자들이 젊어지고 생활환경이 달라지면서 예전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다.

고향집 마당 앞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울진 사투리로 ‘웅굴’이다. 우리 집이 마을 뒤편에 있다보니 마을에서는 뒤웅굴이라 불렀다. 일반적인 시골 우물과 달리 두레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표주박을 쓰는 우물인데 샘이 깊어 겨울에는 하얀 김이 무럭무럭 올랐고, 여름에는 손이 시릴 정도였다. 그렇다보니 작은 구덩이임에도 온 동네가 넉넉히 사용하고도 언제나 샘물이 졸졸 흘러넘쳤다.

아버지는 항상 우물가에 표주박을 올려두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사용하다보니 금방 부서지고 없어졌다. 그것이 아까워 어머니는 표주박을 치웠다. 어느 여름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데 지나던 사람들이 우물에 엎드려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냅다 고함을 질렀다. “내가 웅굴에 바가지 갖다 놔라고 했제” 일순간 분위기가 싸 한데 철없는 내가 한 마디 했다. “왜요? 사람들이 웅굴에 엎드려 물마시면 우리한테 절하는 것 같고 좋잖니껴” 그 말에 다들 한바탕 웃고 ‘아, 글마 똑똑하데이’하는데, 더 똑똑해 보이고 싶었던 작은형이 끼어들었다. “얌마, 절을 한번만 하면 좋지만 꼭 두 번씩 하잖아. 제사지내는 거 맨키로”

이규보의 샘물(寒泉)에서 두 번 절한다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옛길 가 옹달샘에 표주박이 제대로 놓였을 리 없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물을 마시다보면 최대한 정중하게 절하는 자세가 저절로 나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갈증에 한모금만 마시고 가는 사람은 없다. 반드시 두 번은 엎드리게 된다. 첫모금은 해갈하느라 정신이 없고, 두 번째 모금이라야 비로소 물맛을 제대로 보게 된다. 비록 쪽박 크기 옹달샘이지만 이규보와 같은 관료들이 오며가며 그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리니 온 나라를 적시는 것과 다를 바 없고, 그 고마운 마음으로 엎드려 마시니 절이 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그런 경험이 없으니 해석이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왕안석이 삼경신의(三經新義)를 저술하면서 시경 빈풍편 <칠월>의 ‘八月剝棗(팔월박조)’에 대하여 “박조(剝棗)란 대추껍질을 벗겨서 올리는 것이니 노인을 봉양하기위해 그러함이다(剝棗者, 剝其皮而進之, 養老故也)”라고 풀었다.

하루는 왕안석이 산책을 하다가 어떤 초가집에 이르러 노파 보고 주인은 어디 갔냐고 묻자, 대추 따러(박조撲棗) 갔다고 하였다. 왕안석이 망연자실하여 곧바로 돌아와 신종황제께 주장(奏章)을 올려 앞서 올린 13글자를 없애달라고 청하였다고 한다. 송나라 동시대 살아도 생활환경이 다르면 같은 말을 두고 이처럼 오해하는데 하물며 오늘날에야 오죽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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