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파시 칠관운사 지산 이규상

 

근간 어린 아이들을 핍박과 구타와 벌주기로 괴롭히며 숱한 구박과 학대로 사망케 하는가 하면, 심지어 어린 양녀를 들여놓고는 학대와 폭행으로 사망케 한 다음 시신을 불태워 훼손하려 했다는 사건을 접하면서, 참담한 심정 가눌길 없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어릴 적 귀염둥이 아이들에게 <주워온 아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의 연유를 알게 된 적이 있다. 내가 사료조사위원들의 활성화를 위해 전국을 돌며 세미나를 개최할 때이다. 2회째 세미나가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과 영주관광호텔 일대에서 진행할 때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때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일반 행정공무원으로서의 사료조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은 내가 전국 최초였다. 국보급 문화재를 계속 발굴해낸 나에게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실 최근영 실장이 종합 확인 차, 나를 면담하려 울진을 다녀가기도 했다.

또한 울진군 최초 사료조사위원이 되었던 나는 그 후 단체장의 직권 추천으로 강제하다시피 위촉됐다. 당시 최근영 실장은 나를 모델로 하여 시·군 문화공보실장을 당연직으로 위촉할 계획이라고도 말했었다.

여하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주세붕 풍기군수가 설립한 소수서원(당초 백운동서원)의 고장 영주에는 그렇게 사료조사위원 세미나로 가게됐고, 나는 그 많은 서책 중에서 울진사람 영양인(본관) 남사고 선생의 이름이 있음을 확인한 바가 있다.

여기서 주워 온 아이 이야기는 계속된다. 최초의 사액(임금이 내린 현판 액자) 서원이 생겨나자, 향학열에 불타는 젊은 선비들이 찾아들었다. 그렇게 청년들이 북적대자 규수들도 좋은 배필 찾으려고 이곳에 왔던 모양이다. 처녀 총각이 만났으니 자연스레 사랑이 이루어졌고, 임신이 되어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 어쩔 수없이 미혼모가 된 처녀들은 순흥 죽계교 다리 밑에 아이를 버리는 일이 생겨났다.

당시는 대가댁이나 양가집은 물론 일반 가정에서도 불임이 흔한 시절이었다. 후손을 얻기 위해 소실을 두거나 양자를 들이거나 업동이를 업어다가 키우는 것이 흔한 세월이었다. 대를 잇기 위해 죽계교 밑을 찾아 버려진 유아들을 업어다가 후손으로 키운 업동이가 많았다. 귀여운 자식을 어르거나 놀릴 때, 흔히 한 말이 <너는 죽계교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라고 했다는 사연과 유래를 그때 들은 바가 있다. 즉 소수서원의 죽계교 다리 밑이 이 말의 어원인 된 것이다.

그러면서 죽계교 다리 밑이 세월따라 변하여 지방마다 다르게 인용되었다 한다. 즉 죽계교 대신에 지역에 따라 등장하는 다리가 새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말이 유행처럼 퍼져 아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다리 이름이 등장하는 특징을 가졌다고 했다. 서울의 경우는 청계천 다리 밑이 가장 많이 등장했고, 부산은 주로 영도다리라고 했다. 안태 고향이 북면인 나를 비롯한 우리 동네 아이들은 흥부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놀림을 받고 울어버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되어 우리 집 아이들과 손주들까지도 어를 때는 월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했더니, 울음을 터트리면서 밖으로 튀어 나가 달래는데 애를 먹어 본 경험도 가지고 있다. 특히 귀여운 손자손녀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로 사용해 왔었다. 그리하여 <00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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