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문득, 계절 탓인지 괜히 감상에 젖어 200여명의 연락처가 저장된 모바일 메신저를 들여다본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까운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들을 일일이 클릭했다. 무르익은 가을이라 여자들의 프로필은 형형색색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있다.

얼굴을 대신하는 것은 온갖 신비한 꽃들이고 경이로운 음식들인데, 배경에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축제의 현장에서 아들딸과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다.

사진 속에 아이들 아빠는 안 보이는데 이유는 그 시간 남자들은 프로필 사진 찍으러 전부 산에 가 있다. “남자들은 2차 대전에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농담이 새삼스럽다.

1979년 도시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하숙 생활을 했다. 한참 먹어댈 나이라 하숙집 밥으로 부족할까봐 어머니는 내 방 연탄아궁이 옆에 곤로와 냄비 그리고 라면 몇 상자를 사두고 가셨다. 고등학생이 되도록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보니 라면을 끓일 줄 몰랐다.

라면봉지 뒤에 있는 조리법을 따라 끓여보기로 했다. 혼자서 라면 세 봉지 정도는 거뜬했던 때라 커다란 냄비에 물을 잔뜩 붓고 곤로에 불을 붙였다. 이제 물이 팔팔 끓을 때 라면만 넣어야 되는데, 문제는 ‘팔팔 끓을 때’ 라는 게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몰랐다. 김이 팔랑팔랑 나는 것 같아서 아직 냄비도 뜨거워지기 전인데 라면 세 개와 스프를 넣었다. 라면이 불어 냄비에 가득 차도록 끓였지만 면은 익지 않았다. 간장을 부어 국수처럼 어떻게 먹어볼까도 해봤지만 밀가루 맛이 나서 도저히 먹지 못하고 수체구멍에다 전부 쏟아버렸다.

그렇게 하면 하수구를 통해서 먼 데로 사라질 줄 알았다. 잠시 후 옆집 할아버지가 동네방네 고함을 질러댔다. “어느 놈이 도랑에 우동을 산더미 같이 버리고 도망갔어!” 그 일이 있은 후로 혼자서 라면은 끓여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오로지 라면만 끓일 줄 안다.

내 어릴 때 기억으로 예전에 산골마을 아버지들은 겨우내 노름으로 세월을 보냈다. “화투놀이 몰아내고, 우리마을 새마을로!”라는 구호가 나오기 한참 전 얘기다. 하루밤새 황소 한 마리가 온 마을 외양간을 떠돌다가 새벽이면 노름 판돈 대는 전주(錢主)네 외양간으로 들어간다는 농담도 있었다.

전해들은 말로 선친도 한 때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노름으로 며칠 밤을 지새우고 돌아와 식구들과 밥을 먹는데, 꾸벅꾸벅 졸다가 밥숟가락이 고추장 종지로 가더니 한 숟갈 가득 떠서 입으로 가져가더란다. 조부께서 보다 못해 “야야, 그거는 장이다” 했더니, 숟가락을 밥상에 내리치면서 “장이면 갑오다!” 하고는 손바닥을 말아 이마를 탁 치더라고 한다. 그 시절 아버지들은 전부 전생에 나라를 구하신 분들이었던지 그래도 당당했다. 아마 그분들은 집 지을 때 말고 부엌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지 않았나싶다. 끊임없이 술이 나오고 밥이 나오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내 생각에 우리나라 아버지들은 전부 천당에 못 가실 듯하다. 그 시절을 보낸 할머니들이 지금에 와서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저 양반은 생전에 남들한테 하도 잘해놔서 죽어서 틀림없이 천당에 갈 뻔 했는데 나 때문에 못가, 나를 하도 고생을 시켜놔서 내 때문에 못가” 나도 그 속에 제일 막내로 포함될 듯해서 걱정이다. 최근에 전자렌지 사용법을 조금 배워놓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저 데우기만 했을 뿐인데 내가 한 건 맛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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