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51)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고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찰 때가 있다.

나는 서울 문정동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방 한 칸을 서재로 만들었다.

서재에는 2,500여 권의 책이 있는데, 책은 계속 쌓여 중요도에 따라 버리지만, 방 한쪽에 쌓여 있는 고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고서를 거실에 내 놓고 보니 130여 권이었다. 담양전씨 갈령파 15대 종가, 500여 년이 흐른 세월인 셈치고는 많은 책이 아니었다. 책에 대한 관심이 없을 때 고서를 정리하며 버렸다는 생각이 어스름하게 떠올랐다.

지금 남아 있는 우리 집 고서는 대를 거듭하여 전해온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애국지사이신 배근 증조부님, 형규 조부님, 아버지 이렇게 3대에 걸쳐 공부한 책이었다. 아버지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남진영 선생을 집에 모시면서 학문에 심취하셨고, 조상의 향기가 묻어있는 책을 보물처럼 아끼셨다. 증조부님은 문집을 받을 때마다 책의 끝부분에는 반드시 주소를 쓰고 ‘冊主 田培根’ 책주 전배근이라 이름을 적고 도장까지 찍었다. 남이 낸 책이라도 소중히 다루었다.

40년 전 울진을 떠나올 때 다른 것은 고향집에 다 두고 왔으나, 선반위에 덩그렇게 놓여있던 책만큼은 챙겼다. 그러나 400여 년 간 문중회의 시 마다 기록해 놓은 둘레가 허벅지만한 두루마리 문서 2개를 남겨두었는데, 행방불명이다. 거기에는 문토를 장만한 내역과 소소한 경비지출까지 적혀있어 문중의 역사이기도 하다.

나는 서울에 올라와서 다섯 번이나 이사를 했다. 앞으로도 이사할 기회가 더 생길 수도 있고, 본의 아니게 분실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선조의 손때와 영혼이 묻어있는 고서를 안전한 장소에 위탁하여 보존하고 싶었다. 알아보니 전국에 사료를 보관하는 곳 중에서 내가 원하는 곳은 안동에 소재한 한국국학진흥원이었다. 800여 가문에서 위탁한 책과 문서들을 가문별로 별치 관리하고 있었다. 위탁하고자 하는 뜻을 전달하자, 안동에서 학예사 두 사람이 올라 왔다.

고서와 문서를 분류하고 목록을 적으며 정리해 보니 고서류 35종 126책, 고문서류 21점, 기타 1점 등 총 148점이었다. 고서는 시전, 맹자언해, 시경언해 3책, 시전대전 6책인데 300여 년은 지난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주자서절요 10책, 조선환여승람, 논어, 맹자, 중용, 간제사고 27책, 강원도지 6책, 담양전씨 대동보 31책이 있었고, 필사본으로는 고문진보 2책, 칠언두시, 맹자언해, 백련 구, 천자문 2책이었다.
 

문집 16책에는 경은문집, 우와문집, 만은문집, 이우당문집, 한재문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문서로는 행장, 시문, 몇 건의 간찰, 관혼상제 부조기와 땅 매매 문서가 있었다. 여성이 쓴 것으로 보이는 한글 제문도 보였다. 섭섭함보다는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조상들의 정신을 전달했기 때문에 부담이 없어진 탓인지도 모른다.

누렇게 빛바랜 오래된 책들을 책꽂이에 두는 것은 지혜다. 책과 함께 추억을 간직한다면, 어쩌면 그것이 책의 마음이요, 고서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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