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 242호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을 찾아서(2)

 

◆ 발견 경위
원래 봉평비는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의 주두원 소유의 논에 밑부분의 일부분만 드러낸 채 거꾸로 박혀 있었다. 논 주인은 이 돌로 인해 평소 농사를 짓는데 불편을 겪고 있었는데, 마침 전반적인 객토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1988년 1월 20일 마을 객토를 위한 길 작업을 하던 중, 논 주인 주두원씨의 부탁으로 포크레인 기사가 이 돌을 파내어 동치천(東治川) 남쪽 제방 뚝 밑 논 입구 옆에 버렸다.
한동안 이 돌은 방치되어 있다가 마을이장 권대선씨가 이 돌이 웅장하고 모양이 특이하여 집 정원석으로 사용하고자, 3월 20일 길 옆을 지나가던 포크레인 기사에게 부탁하여 집으로 옮기려다가, 개울 건너 북서쪽으로 약 50m 떨어진 성황당 옆으로 옮겼다.

이장은 돌에 글자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흔적이 있음을 발견하고 손으로 긁어보니 글자 같은 것이 계속 나오자, 다음날 아침 9시 30분경 죽변면사무소 총무계장 권계웅씨에게 전화를 걸어 신고를 하였다.
권계웅씨는 현장을 확인하고 군청에 보고하였으며, 군청 문화공보실 직원 3명이 현장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공보실 직원들은 소풀 먹이러 간 아이들의 낙서 정도로 인식, 아무 가치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런데 그 달 26일 이규상 군청 문화재 계장이 혼자서 현지 조사를 했는데, 그는 돌에서 가로(橫)로 ‘지지왕(智智王)’ ‘마찰사(麻察使)’ 등 새로운 왕의 이름이 나오자 고비(古碑)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여 당시 장학중 부군수에게 보고하였다.
그 후 그는 그 달 29일 경북도 시․군 문화재계장 회의에 참석하여 울진에 고비석이 발견되었다고 구두로 보고하고, 4월 9일 향토 서예가 윤현수씨가 한 탁본을 4월 11일 경북도에 제출했다.

한편, 비가 발견된 정보를 입수한 매일신문사 문화부 박진용 기자 외 2명이 곧장 울진에 도착해 비석과 윤현수의 탁본을 촬영하고 그의 판독문을 입수하는 등 비의 출현 사실을 독점 취재하였다. 그리고 박진용 기자는 이 비가 신라시대의 비임을 확신하는 계명대학교 노중국 교수의 자문을 받아 4월 15일 《매일신문》1면 톱기사로 특종 보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구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고대사연구회(지금의 한국고대사학회) 소속의 노중국, 주보돈 등 여러 교수들이 4월 16일 울진에 도착하여 비문을 탁본하는 등 글자를 판독하고 그 내용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전문가들의 조사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가 다음날 《매일신문》을 통하여 재차 보도되자 전국의 각종 매스컴에서도 신라 고비의 출현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었다.
또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에서도 김철준, 임창순, 황수영 등 문화재위원으로 구성된 조사팀을 구성하여 4월 16일 현지조사를 하게 되었다.

또 5월 5일 울진 현지에서 한국고대사연구회가 비문을 다시 정밀 판독할 때에 대구대학교 이명식 교수가 데리고 온 한 학생에 의해, 비가 발견된 논에서 길이 15 × 폭 3.3 × 두께 6.3cm 크기의 비편(碑片) 1점이 발견되었다.
이는 논에 있던 비를 포크레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것 이었다. 이 비편을 본 비에 부착함으로써 비로소 봉평비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울진군은 이를 인수하여 5월 19일 서울에 있는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 인계하였고, 경상북도는 5월 26일 <문공 35312-15380호>로 울진신라고비 문화재 평가심의 결과, 5백만원의 신고 보상금이 책정되었다.

◆ 발굴조사
그해 5월 9일 문화재관리국은 문화재연구소(지금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울진신라고비 출토지역에 대한 유구확인조사를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동 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 조유전 실장 등 6명의 발굴조사단이 구성되었으며, 동년 5월 12일부터 5월 23일까지 원래 비가 있던 논에 대하여 긴급수습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이 일대는 원래 모래층 위에 객토하여 논으로 사용하고 있음만 확인하였을 뿐이다. 즉 비가 세워진 흔적(碑座) 등 어떠한 유구도 찾을 수가 없어서 비가 원래 위치하였던 정확한 장소를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또한 비가 논 안에 처음 있던 곳이 원 위치가 아닌 것으로 밝혀져 비가 부근에서 이동되어 졌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비가 발견된 부근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아니라 트렌치 위주의 시굴조사에 거쳐 아쉬움을 남겼다.


◆ 국보지정
이 비의 성격을 밝히기 위하여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제기되어 대우재단 후원과 한국고대사연구회 주최로 1988년 7월 22일부터 23일에 걸쳐 계명대학교 대학원 세미나실(대명동 캠퍼스)에서 ‘울진 봉평 신라비(가칭)의 종합적 검토’ 라는 주제로 첫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정밀한 판독과 분석을 통하여 이 비가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서 당시 발견된 신라시대 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임이 밝혀졌다. 또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 외에 새로운 내용을 많이 담고 있음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학술회의 결과는『한국고대사연구』2호에 울진봉평신라비 특집으로 꾸며져 1989년 5월 25일 발간되었다. 이 비의 명칭에 대해서도 학자들 간에 ‘울진봉평신라고비’, ‘울진거벌모라비’ , ‘울진봉평신라비’ 등 논란이 있었으나 학술회의를 하면서 ‘울진봉평신라비’로 부르기로 잠정 일치를 보았다.

한편 문화재관리국에서도 간략하나마『울진봉평신라고비조사보고서』(1988.8)와『울진봉평신라비조사보고서』(1988.9)를 발간하여 이 비를 국보로 지정함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1988년 11월 4일 경상북도 <문공 35300-31877호>에 의해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으며, 이때 명칭도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라 확정되었다.
이후 비가 발견된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울진군이 주최하고, 한국고대사학회가 주관한 학술대회가 1998년 8월 24일 울진군청 대회의실에서「한국고대사회와 울진지방」이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이 대회 내용은 1999년 2월 15일『국보 제242호 울진봉평신라비 발견 10주년 기념 학술대회 논총』으로 발간되었다. 그동안 이 비와 관련된 논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십 편이 발표되어 지금까지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심현용 울진군청 학예연구사 제공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