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온 겨레 정성덩이 해 돼 오르니 올 설날 이 아침이 더 찬란하다. 뉘라서 겨울더러 춥다더냐 오는 봄만 맞으려말고 내손으로 만들자” 존경하는 정인보님이 작사한 ‘새해의 노래’ 1절이다.

그런데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설날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정월 대보름달이 떠오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주변 사람들도 보름날에 더 어울리는 노래라고 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일월성신이시여” 비손(기도)을 해도 우리 조상들은 해님 보다는 달님에게 온갖 치성을 드렸기 때문에 정성덩이는 아무래도 정월 대보름달이 아닐까싶다. 대보름을 하루 앞두고 나물 안주에 귀밝이술 한 잔으로 그 시절 이 밤을 따라 가본다.

흔히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설날부터 대보름까지를 축제의 기간이라고들 하는데, 도회지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마을마다 골골마다 동제(洞祭)를 지냈던 울진 산골에서는 대보름을 앞두고 이레 동안 축제는커녕 그지없이 엄숙한 절제의 기간이었다. 어른들은 아기 울음소리조차 담장을 넘지 못하게 단속을 했다. 동제의 정안수로 쓰이게 될 우물이 지정되면 그 우물에서부터 동티를 막는 붉은 흙이 골목마다 깔리고 우물 주변에서는 말소리까지 낮추었다.

동제 제관(祭冠)은 지난 한 해 동안 집안에 변고가 없고 일상에 모범이 되는 두 사람이 임명되었는데, 제관은 동제기간 동안 금주(禁酒)는 물론이고 일체의 불측한 행동거지를 삼갔다. 동제기간에는 사람들이 제관들에게는 말을 걸지 못했으며 심지어 아이들이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한번은 동제에 쓰일 제물(祭物)을 지게에 지고 오는 제관 아재를 등굣길에 만난 적이 있었다.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더니 대답도 없이 아예 못 본 듯 지나치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고자질했다가 오히려 된통 혼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긴장 속에서 마침내 대보름 전 날 자정(子正)이 되면 동네는 쥐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 당산나무 아래 촛불이 켜지고 동네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 온 동네 사람들의 간절한 정성들도 함께 한다. 그 정성덩이가 다음날 보름달이 되어 동산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성덩이가 오래오래 온 마을을 굽이 살펴 주십사 짚을 태워 연기로 그을렸을 것이다. 그것이 놀이가 되고 달집태우기라는 용어로 정착했는데 왜 하필 이름이 ‘달집’인지, 또 왜 달집을 태우는지 요즘은 아는 사람이 없다.

짚으로 달을 실컷 그을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작은댁 할매가 콧구멍까지 새카매진 얼굴을 씻기며 이것저것 묻는다. 누가 보름달님을 가장 먼저 봤는지, 그 총각이 올해 장가가겠네 하며 웃는다. 달에 소원을 빌어두고 달이 너무 밝아 그 소원이 노출되는 것도 썩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을 그을리는 행위에는 그런 의미도 들었으리라.

과거 농어촌 사회에서 달이란 생산력과 생활을 지배했다. 세시에 온갖 풍속과 민속 신앙 행위 등이 정월 대보름에 집중해있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귀밝이술이 그러하듯 부럼이니 오곡이니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된 음식들이나 더위팔기 같은 주술적인 행위들도 대부분 대보름과 연관이 있다. 그처럼 대보름은 우리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울진 산골에서도 동제(洞祭)는 모두 사라졌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오히려 도시에서 가끔 동제와 달집태우기를 만나는 때가 있다. 가까운 경기도 시흥시에서도 크게 행사를 하고 있는데 향수(鄕愁)나 달래고자 어쩌다 가본다. 행사 진행자는 마이크 소리로 크게, 달집을 태우면서 소원을 빌란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소원은 어제 빌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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