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에 잠들던 그 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이호우님의 시 달밤의 일부이다.

선생께서 울진과 가까운 청도 출신이니 “달이 밝았더니더”가 더 어울리는 아주 멋진 시다. 무언지 그리운 그 밤들을 찾아가면 내게도 조웅전을 읽는 소리가 또렷해진다.

한문(漢文)에 해박하셨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한문에는 관심이 없었고, 군담소설(軍談小說)을 즐겨 읽었다. 조웅전, 유충렬전, 임경업전 같은 고전소설들이다.

샛노란 바탕에 알록달록 원색의 그림으로 장식된 표지가 무척이나 조잡해 보이는 딱지본 소설책들이 안방에 쌓여있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딱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딱지본 또는 처음 제작당시 6錢에 판매되었다고 해서 육전소설(六錢小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고전소설책들. 그 밤을 따라가면 아버지는 조웅전을 읽으시고 어머니는 들으며 잠들었다. 아버지 마흔에 태어난 나도 그 소설 읽는 소리를 함께 들으며 요람기(搖籃期)를 보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형과 같은 방을 쓰면서 그 소리는 멀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차츰 줄어들더니 그나마 들리던 소리마저 끊어졌다. 알고 보니 아버지께 노안(老眼)이 찾아온 거였다. 등잔불 아래서 더 이상 딱지본의 글자를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어책을 겨우 읽던 나는 멋도 모르면서 자신있게 내가 읽어드린다고 나섰다.

아, 그 고역이란. 뜻도 모르는 옛날 말이라 떠듬떠듬 거리며 읽는 것도 고역인데, 아버지가 읽을 때는 그렇게 부드럽게 들리던 5,5조 리듬이 도저히 입에 붙지 않는 거였다. “요조숙녀는! 군자호구요!” 불과 몇 분 만에 짜증이 밀려와서 학교에서 국어책 읽듯 쪼르르 읽어 내려가면 “아야, 됐다 그만 가서 자라” 한다. 한참 후에 라디오가 안방에 놓일 때까지 아버지 어머는 얼마나 심심하고 답답하셨을까.

어느새 나도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고, 내게도 노안(老眼)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거미 같은 것이 눈앞에 아른거린다싶더니, 불과 몇 년 사이에 가까운 글자들이 부옇게 흐려져 버렸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으니 집중도 안 되고 속도가 절반으로 뚝 떨어진다. 그마저 밤에 책을 읽으려면 금방 지쳐서 내 입에서 “아야, 됐다 그만 자러 가자”가 절로 나온다. 편하다는 다초점 안경을 쓰고도 이 모양인데, 돋보기도 없던 옛날 사람들은 이 갑갑함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소리 내어 책을 읽고 머리에 외워두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 선생께서는 그 두꺼운 맹자(孟子)를 2천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완전히 암기했던 게 아닐까싶다. 책을 머릿속에 넣고 길을 걸으면서 성독(聲讀)을 했기에 맹자 양혜왕장(梁惠王章)에서 공손추장(公孫丑章)까지가 몇 리요, 울진서 어디까지가 맹자 진심장(盡心章) 거리다 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다 잊어버린 지 오래지만 예전에 맹자 성독 시간이 있었다. 맹자를 그치지 않고 다 읽으면 약 2시간이 걸린다.

아내는 고전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되게 싫어한다. 이제 이 나이에 고전을 외워도 머릿속에 들어갈 리 없지만, 나도 앞으로 책을 못 읽게 될 텐데 어떨까 싶어 논어(論語) 성독 CD를 구해서 컴퓨터에 틀고 따라했더니 난리가 났다. 좋아하면 혼자서나 즐기지 왜 식구까지 괴롭히느냐고 성질을 낸다. 옛날 아내들은 남편이 책 읽으면 들으면서 잠들었다고 했더니 “아, 됐어 그게 한글 소설이야?” 한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