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희 (서울 출향인, 작가)

 

상수리나무 아래서

(2017년 시문학 신인우수작품상 공모 당선작 2)

 

가난한 손아귀들이 힘겹게 움켜쥔 호박돌로
상수리나무 허리춤을 때려 열매 털어낸 흔적
화들랑거리는 가지를 놓치고 소리칠 틈도 없이
와스스 떨어졌을 빡빡머리 상수리 열매들은
껍질 벗기고 물에 실컷 불어 맷돌에 갈린 뒤
묵이나 죽으로 또는 붉은 국수나 밥으로 익어
오랜 굶주림 끝에 헛김만 남은 백성을 살려냈지

옛날 얘기가 그리워지는 오늘의 깊은 허기
쓸쓸하고 허전하고 으스스한 한기를 덜어내고파
내려앉는 볕뉘를 제 몸에 덮으며 윤기를 바르는 아침

물기 말라버린 나뭇가지의 가느단 등줄기를
투사의 패기로 우죽우죽 기어오르는 벌레들
절도 있게 구부리고 펴는 무수한 몸짓의 박음질
양말처럼 벗어 던진 셀 수 없는 생명의 껍데기들
낙엽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느새 대지를 삼켜버린 겨울

꿈속에 촉수를 벼리며 가슴엔 심지 샛별 같이 돋우고
미지근한 체온을 데우는 상수리는 그 열로 겨울을 난다
울퉁불퉁한 상처를 다독여 너울대며 위로의 옷을 기우는 동안
진물은 꼬들꼬들 솔고 아픔은 뭉근하게 잠든다

옹송그린 채 지워짐을 기다리는 너와 나, 우리
푸서리에 떨어진 상수리와 도토리가 맨가슴 비비며 뒹굴다

 

※ ‘상수리나무 아래서’ 에 대한 김규화, 신규호, 심상운의 심사평-「상수리나무 아래서」는 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상상이 빚어내는 서술이 아름답게 감지된다.
‘꿈 속에 촉수를 벼리며 가슴엔 심지 샛별 같이 돋우고/ 미지근한 체온을 데우는 상수리는 그 열로 겨울을 난다’ 는 구절에서는 상수리와 시인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는 존재의 일의성을 인식하게 한다.
그의 직관적인 싱싱한 감성과 상상력은 앞으로 더 새롭고 깊은 시 세계의 형성을 기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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