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사람들은 새소리는 이해하지 않고 들으면서 그림은 이해하려 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꾸만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피카소가 한 말이다.

아내가 미술을 전공하고 학원을 운영하고 있어서 많은 작품들을 접해왔지만 솔직히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른다.

인상파 화가 모네의 ‘연꽃’에서 미감(美感)을 얻은 칸딘스키의 대모험이 추상화라는 세계를 열어, 미술의 차원이 외면과 내면을 통섭하게 되었다는 이론적 논리에는 고개를 끄덕이되, 눈에 들어온 추상화는 청각으로 받아들인 새소리처럼 이해하지 않고도 좋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지난 3월1일 서울 한복판 덕수궁에서 울진사람 40명을 만났다. 20대 이후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울진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보니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반가웠다. 지금도 눈에 선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고향 분들과 울진 출신 대화백(大畵伯) 유영국님의 작품을 감상했다.

추상화에는 까막눈인 내게 미술이 들어와 감탄이 터지는 신비감을 경험한 것도 그 때였다. 입구에 걸린 첫 작품을 보는 순간 옛날 울진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생선을 말리던 낡은 덕장이 떠올랐다. 이어서 그 마을에 살았던 가난한 동무가 생각났다. 방파제도 없는 어촌 마을에서 덕장에 말린 생선이랬자 언제든 무엇이든 가무잡잡하고 성글고 거칠었다.

반농반어촌 학생들이 학교에서 짝꿍과 도시락을 같이 먹을 때는 가끔 서로가 이유도 모르고 싸움이 일어난다. 짝꿍이 반찬으로 싸온 생선을 몸통살만 대충 먹고 버렸다가 혼난 산동네 아이는 쌀알을 대중없이 남기는 짝꿍에게 대든다. 꼬맹이들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왠지 부모들의 목숨과 피땀이 버려지는 것 같은 느낌 들기 때문이다. 유영국 화백의 작품에는 그 바닷가 마을과 산동네 마을이 들어있었다. 화백의 작품에 제주도 중산간마을의 느낌이 많이 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입구의 첫 작품에 너무 빠져버린 탓에 다른 작품들도 내가 아는 장소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진의 작품을 만났다. 내 아동기 소 풀을 뜯기며 정신없이 놀았던 장소가 딱 저랬다. 초여름 아침 식전에 소를 몰고 가면 그림의 오른 쪽 먼 바다에서 해가 뜨기 시작한다. 바다에서 가까운 산들이 햇빛을 막아 중산간은 어둠과 여명이 혼재하고 골짜기에는 아직 밤이 깔려있었다.
 

우뚝 솟은 산 쪽에 가득한 햇빛이 산을 넘어 어슴하게 푸른빛을 띠면 바닷가 산들의 틈을 비집고 나타난 또 다른 햇빛은 아이들이 노는 산비알의 풀밭에 삐죽이 깔린다.
사진의 작품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가까이 사는 고향 후배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여기가 어디 같나?” 한참 만에 전화가 왔다. “추상화를 내가 우에 아니껴. 근데 이거 재미펀들 아이니껴?” 맞다.

어떤 추상화 작품전은 내레이션이 온통 내면의 무의식과 몽환적이 어쩌고 하는 용어들이 난무하여 정신분석학 강의를 듣는 느낌이 들곤 한다. 내게 유화백의 작품에는 그런 설명이 필요없어서 더 좋았다. 내 유년의 또렷한 의식만으로도 충분히 이해가능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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