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의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동행취재기

 

58년 전 사라호 태풍 이재민 66세대 364명 이주

<내사랑 울진> 밴드 주관 출향인 60여명 일손도와


 

◆울진마을의 역사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에는 無에서 有의 기적을 이룬 울진 사람들이 산다. 그들이 울진에서 머나먼 철원으로 가게 된 까닭은 1959년 추석 날 새벽에 닥친 태풍 ‘사라(Sarah)’ 때문이었다.

사망 실종 849명, 이재민 373,459명, 선박파손 11.704척, 피해가 엄청났다. 선박파손이라는 용어가 유별나듯 동해안, 특히 울진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큰물에 거랑들이 천방”을 넘쳐 곳곳의 마을들이 사라져버렸다. 그해 겨울을 혹독하게 보낸 이재민들에게 이듬해 초 달가운 소식이 전해진다. 홍창섭 도지사가 철원군에 이주해 살도록 권유했다. 땅을 개간해서 농토를 만들 동안 충분한 장비와 양식을 지원하기로 약속도 했다.

그리하여 1960년 4월3일, 66세대 364명이 군용트럭 23대에 나눠 타고 울진을 출발하였다. 트럭은 3박4일을 덜컹거려 4월7에야 도착한다. 임산부 안정희씨는 화천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딸을 낳게 된다. 그래서 아이는 화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들이 당도한 마현리는 전쟁 전에 800여 주민이 살던 곳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했다. 집들이 있을 걸로 짐작했으나, 막상 트럭에서 내려진 주민들을 기다리는 것은 군인들이 쳐놓은 60개의 덩그런 천막이 전부였다.

더구나 스무날이 지나갈 때 쯤 4·19혁명이 일어났고 도지사가 바뀌었다. 책임 질 사람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라진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과 관련한 서류마저 몽땅 증발해버렸다. 그러나 마현리에 버려지다시피 던져진 울진 사람들은 악착같이 일어났다.

지원받은 양식도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했다. 한 가마니에 닷 말이라는 엄청난 이자가 붙은 보리쌀을 꾸어다 허기를 채웠다. 귀한 볍씨를 사서 못자리를 해놓았다가 워낙에 우거진 숲속이라 못자리를 찾지 못해 묵혀버린 적도 있다.

그런 땅을 억척같이 개간을 한다.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 소를 샀다. 쇠로된 쟁기는 그들에게 사치였다. 나무로 고레를 만들어 논밭을 일궜다. 잔돌을 미처 골라내기도 전에 맨발로 지근지근 밟아 모내기를 했다.
 

◆역경을 넘고 넘어
그러는 동안 군인들은 사사건건 간섭을 했다. 배가 고파 풀뿌리나 열매를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가 들키는 날엔 어른들도 나이 어린 군인들에게 뺨을 맞고 군화발에 조인터를 까였다.

그래도 이주민들은 먹고 살자니 통제구역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마현리 마을 이장인 이상경씨 형님도 산에서 지뢰에 발목을 잃었다. 이주민들은 먹을 것과 쟁기가 절실했다.

보다 못한 한 부대장이 쌀 두가마니를 주며 술을 빚어 군인들에게 팔아서 돈을 마련해보라고 했다. 몰래 몰래 군인들에게 술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장비를 샀다.

마현리 일대는 6.25 격전지여서 쇠로 된 장비로 깊이 팠더니 탄피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탄피 한 관(4Kg)에 보리쌀 세 말, 여간한 수입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군인들의 통제 때문에 내다 팔 수 없었다. 군인들은 와수리 장날 시장에도 5명이 1조가 되어 구호에 따라 움직이게 했다.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에서는 샅샅이 뒤져 탄피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구타를 했다. 남자 어른들은 사추리까지 뒤지는 바람에 좀 채 엄두를 내지 못했고 아낙네들이 숨겨서 내다 팔았다.

내가 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연도 있다. 남자들 대신 마현리 울진 아낙들이 탄피를 팔아 돈을 마련하였는데, 아기가 있는 아낙은 보자기에 탄피들을 펼쳐서 둘둘 말아 띠를 만들어 몸에 감고 탄피 위에 아기를 업어 검문소를 통과했다. 아이가 없는 아낙들은 ‘빤스’나 ‘젓싸개’ 속에 탄피를 숨겨 검문을 피했다.

무게를 감안해서 적당량씩 반출을 했는데 한번은 욕심이 나서 그만 무게를 넘어버렸다. 하필 검문소 앞에서 다 낡아빠진 빤스 고무줄이 끊어져버렸다. 어린 군인 앞에 탄피꾸러미와 함께 구멍 숭숭한 낡은 빤스가 철렁하고 떨어졌다.
군인들의 횡포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을을 통제하던 초소를 박살내버렸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로 군인들의 통제도 줄어들어 점차 화해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히려 군인들을 이용하는 요령까지 생겼다.

어른들은 농사일을 하러 갈 때 예쁜 여고생 딸을 데려간다. 혼자 논에 가면서 낫은 30 자루 챙겨간다. 논둑에 여고생이 왔다 갔다 했을 뿐인데, 잠시 후면 60트럭에서 군인 30명이 내려 낫을 들고 풀을 벤다. 그러나 화해가 필요한 것은 군인과의 관계만이 아니었다.
 

◆마현리 2세들의 혹독한 고난사
지난 7월 15일은 <내사랑 울진> 밴드에서 마현리 울진마을 일손 돕기 행사를 했다. 취재를 핑계 삼아 따라갔다. 사실 그동안 마현리 정착민 1세대의 사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2세들의 사연이 궁금했는데, 마침 이상경 마을 이장님을 만나게 되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마현리 2세대라고 적지만, 그들 스스로는 마현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들이 진정한 마현리 1세대라고 했다. 마현리에서 태어났다고 무조건 1세대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는 나를 기르시니”의 유교적 원칙에 따라 어머니 뱃속에서 울진을 떠나온 1960년생은 마현리 1세가 아니었다. 마현리 군용텐트에서 배태된 사람만 마현리 1세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상경 이장님은 빠른 61년생으로 ‘가장 먼저 마현리에서 만들어진(?) 사람’이라 자부했다.

그런 이장님께 물었다. “울진에서 이주한 1세대 덕분에 2세대들은 고생을 안 했다고 하던데요?” “1세대들의 고생과 2세대들의 고생을 양팔 저울에 올린다면, 1세대 고생은 세 개를 올려야 될 걸요” 이장님이 양팔 저울에 비유한 데는 파프리카를 크기별로 선별하는 저울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인데, 1세대의 그 끔찍한 고역이 2세대에 비해 1/3밖에 안 된다니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상경 이장님과 경상도 감포에서 시집 온 아내 사이에는 자녀가 셋이다. 첫째 딸 이름은 초희, 둘째 아들은 성희 막내아들은 재선이다. 이름이라도 순해서 아이들이 부침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자이름으로 지었단다. 그만큼 마현리 2세들은 학창시절 부침이 심각했다.
학교에서는 이상한 사투리와 특이한 습관을 지닌 그들을 친구로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동네 아이들끼리만 어울릴 수밖에 없었는데, 자꾸 시비를 걸어오는 통에 싸울 수밖에 없었고,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단다. 그런 경험 때문에 아들에게 여자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아들의 여자 이름 때문에 생긴 일화도 있다. 큰아들 성희가 영재 선발 명단에 포함되었는데, 교육청 담당관이 여자중학교에 찾아가 성희를 찾고 있었단다.

마현1리는 분지다. 비가 조금만 많아도 거대한 산들이 쏟아놓는 물 때문에 하천이 넘치기 일쑤다. 관계수로가 절실하였지만 지원이 시원찮았다. 이장님은 공무원들이 적극 나서주지 않아서라 했다.

마현1리에서 배출 된 공무원은 지금까지 단 2명뿐이다. 70여 가구가 정착한지 60년이 다 되도록 공무원이 2명밖에 없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이유는 아이들이 학교나 단체에서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다. 공무원이 되어도 마현1리 출신이란 딱지를 달고 단체 일원으로 적응할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장님은 자녀들을 고등학교는 춘천으로 진학시켰다. 사모님은 매일 새벽 철원에서 춘천까지 차를 달려 아이들을 등교 시키고 돌아와 그 힘든 농사일을 치러내는 억척을 부렸다. 덕분에 아이들은 잘 성장해주었다. 큰 딸 초희(29세)는 대기업에 취업해서 서울에 정착했다. 둘째 맏아들 성희(28세)는 육군사관학교에 2등으로 입학하여 현재 중대장으로 복무중이다. 서울대학교도 충분히 들어갈 성적이었지만, 어려서부터 군인을 희망하여 육사를 갔다. 막내는 현재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2세대들의 고통은 그로서 끝이 아니었다. 1세대들이 죽을 고생을 해서 일궈놓은 땅에 주인이란 사람들이 나타났다. 정부는 ‘특별조치법’을 재정하여 원 주인이라는 사람들이 보증인 3명 이상 내세우면 소유권 보존 등기를 해주었다.

그 바람에 마현1리 울진촌은 개간한 농지 70%를 잃었다. 2세대들은 그 땅을 주인으로부터 되 사거나 임대해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1세대의 피나는 노력이 2세대에게 빚으로 남겨지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대들은 아는가!
지금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는 철원군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에서도 내로라 할 정도로 부자마을이다. 1천 평당 설비비(設備費)만 1억5천만 원이 든다는 하우스농장을 가구당 최소 3동 이상 보유하고 있다.

전국 파프리카 생산의 1/3이 철원에서 생산되며, 철원군에서 생산되는 양의 1/3이 마현리가 차지한다. 이만하면 반전을 넘어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 부럽기도 하고 샘이 나서 이장님께 약을 살짝 올리기로 했다.

“이장님, 이 정도 규모 마을이면 술집이나 카페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마을 전체에 작은 슈퍼 하나가 유일한 가게다.

이번에도 역시 이장님의 반격에 항복하고 말았다. “술 마실 시간이 있어야지요” 마현리 2세대들은 웬만한 농사꾼들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지런했다. “새벽 5시에 파프리카 농장에 나와서 밤 11시에 들어가는데 술 마실 시간이 어디 있냐”는 거였다.

그나마 자동선별기를 갖춘 이장님댁 농업법인은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지만, 개인 선별기로 포장을 하는 분들은 그 시간이 되어서야 선별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땅만 있다고 부농이 거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피땀이 땅을 적셔야 결실이 얻어진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장님은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석으로 안내했다.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조국 강산의 가장 중심된 이 농토가 누구의 피땀으로 가꾸어졌는가를. 사라호 태풍 때 울진 수재민 66세대는 1960년 4월 7일 이땅에 입주하여 고달픈 천막 생활과 허기진 배를 주리어 피땀으로 얼룩진 괭이와 호미로, 6.25동란 이후 버려진 황무지를 옥토로 가꾼 개척정신의 빛나는 업적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조상들의 숭고한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여기에 조그마한 비를 세우노라-

담백한 울진식(式) 문장이 참 잘 어울린다. 이장님이 청년회 회원일 때 마을 청년회에서 세웠다고 한다. 외부에 비석 문구를 의뢰해서 잘 쓴 글들이 접수되었지만, 마현리 주민들은 저 비문(碑文)을 선택했다. 직접 겪은 사람은 수식이 필요 없다.
 

◆ <내사랑 울진> 밴드의 울진사람 사랑
<내사랑 울진> 밴드 회원들이 버스에서 내렸을 때, 그들을 맞아준 마현리 사람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뿍 묻어 있었다. 자신들은 울진인이며 울진인의 자부심으로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했다.

홍수 때 울진군에서 보내준 양수기가 그렇게 고마웠다고도 했다. 한편으로 예전에는 재경울진군민회 체육대회에서 특별히 마현리 부스까지 만들어 초청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공식적인 초청이 끊어졌다고 아쉬워했다. 일손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저 울진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 나는 것만으로 즐거워했다.

그러나 일손을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 또한 울진 출신들이다. 부지런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무더위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농사일을 도왔다. <내사랑 울진>밴드 리더이자 울진신문 서울지사장인 황승국 선배는 아드님과 함께 근남면 팀에 합류해서 저녁에 녹초가 되어 나타났다.

수도 서울의 치안을 책임 졌던 주상용 전(前) 서울경찰청장님도 손수 차를 몰고 오셔서 온몸에 땀을 쏟으며 일손을 도왔다. 8세 때 태풍 사라를 경험했던 오우용 밴드 자문위원님도 연세를 잊고 종일 땀을 흘렸고, 손용한 위원님은 북면 기성면 팀 리드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서양화가 정미애님은 아들까지 데려와 후포 팀에서 고생을 시켰고, 서로해운 대표 최금모 선배님은 사회를 맡아 하루 종일 고생하셨다. 참여한 모든 분들의 성함을 적지 못한 점 사과드린다.

행사를 주관한 황승국 밴드 리더는 울진군에서 마현리 울진마을 주민들을 초청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해 보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울진군과 마현리 울진마을의 연계를 더욱 돈독하게 이어지도록 일조할 것도 다짐했다.

만남의 시간이 너무 짧아 많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다. 부지런한 그들에게 특별히 농한기가 따로 있으랴마는 12월 이후에는 그나마 여유가 있다니, 꼭 다시 찾아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번 행사에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었다. 임광원 울진 군수님은 격려문을 통해 일손 돕기에 나선 회원들과, 역경을 딛고 부농으로 탈바꿈한 마현리 주민들의 노고에 감사와 격려를 했다. 강석호 한국자유당 국회의원님도 바쁜 와중에 격려사를 보내어 이번 일손 돕기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경북도의회 장용훈 의원님도 마현리 주민들에게 머리숙여 찬사를 올린다는 격려사를 올려주었다.

더불어 이번 일손돕기에는 이태용 재경울진군민회장, 배준집 재경경제인협의회 회장, 권기달 <내사랑 울진> 밴드 고문, 오우용 자문위원, 진기승 전재경울진면민회장 등 여러분이 후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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