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얼마 전, 즐겨 읽는 일간지 칼럼에서 ‘알쓸신잡’이라는 낯선 용어를 접했다.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사전>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야구중계 말고는 TV를 거의 안 보는 나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동료에게 물었더니, 오락 프로그램이지만 내용은 어마어마한 지식의 장(場) 펼쳐진다는 것이다. ‘지식과 오락’이라니 말 그대로 지적향연(知的饗宴)이 아닌가. 호기심이 발동했다.

칼럼 작가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대중적인 프로그램에서 무차별적으로 수준 높은 지식을 쏟아내는 바람에 나만 알고 있던 지식이 하나둘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더 이상 내 지식으로 잘난 척하긴 글러 먹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강도를 당한 것처럼 허탈한 심경에 사로잡힌다.” 물론 작가의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도대체 어떤 지식들이 쏟아지기에 내가 존경하는 칼럼 작가마저 알파고를 만난 커제가 되었을까 궁금했다.

일단 TV를 켜고 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보니 소문대로 인기가 있었던지 마침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내가 채널을 멈췄을 때 TV 장면은 경주를 가던 중이었고 출연자들은 각자의 좌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도 커피를 뽑아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는 동안 출연자들은 각자의 학창시절 수학여행으로 갔던 경주를 떠올렸다. 성 호르몬이 폭발하는 사춘기 시절, 명승고적 보다는 옆에 수학여행을 온 다른 학교 여학생들에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말에 가슴깊이 공감하며 히죽대는데, 진행자가 “근데, 수학여행은 왜 하필 경주였을까요?”라는 질문을 했다. 출연 지식인들의 대표 역할을 맡고 있는 듯 보이는 분의 대답에 나는 웃음이 멎고 말았다.

“그동안 경상도에서 대통령이 많이 나오다보니, 경상도를 밀어준 거죠” 이어서 그는 ‘그래서 신라를 띄우고 화랑정신을 부각시키고 그러다보니 경주가 뜨고 그랬던 거’라 했다. 다른 출연자들도 그에 대한 부정은 없고, “그런 것도 있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고 ‘경부선이 먼저 생기고 하다 보니’, ‘경주는 유적지가 몰려 있다 보니’ 수학여행지가 됐다는 것이다.

나는 TV를 끄고 씁쓸한 커피를 들고 일어섰다. 우리나라 최고 지식인에 속한다는 분이, 게다가 자신은 경주 출신이란 분이 그런 인식을 지니고 있다는 데 놀랐다. 내 생각에는 그 분이 오랜 세월 정치적인 고통을 겪다보니 증오하는 정치인의 모든 행위에 불량한 의도가 들었다고 판단하는 게 아닌가싶다. 정적(政敵)을 이기려면 상대를 잘 알아야 효과가 있다. 경주가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가 된 데는 예전 학생들이 모두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에 있다.

일본의 여러 도시 중에 후쿠오카는 역사적인 면이나 국민들의 의식적인 부분에서 의미가 큰 고도(古都)다. 그런 후쿠오카 황실 아악원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현창비(顯彰碑)가 있다는 사실은 한일 양국 국민들도 잘 모른다. 그 현창비는 호소카와 일본 전 수상(首相)의 부인이 주도하여 세웠다.

일본에는 아직도 퇴계 이황을 추도하고 학술을 연구하는 모임이 있다. 퇴계의 학문은 일본으로 건너가 몇몇의 학파에 영향을 주었는데 구마모토 학파의 호소카와 가문이 큰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호소카와 가문의 후인이 일본의 <교육칙어>를 작성했다. 우리는 흔히 국민교육헌장이 교육칙어의 모방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교육칙어가 퇴계의 학문에서 비롯했던 것이다. 현창비에 그러한 내용이 적혀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 후반부 정치철학은 박종홍이 담당했고, 박종홍의 작품이 국민교육헌장이다. 그들은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학생들이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기’를 기대했다. 그러기위해서 학생들에게 조상의 얼이 스며있는 유적지를 돌아보게 했다.

6,25 전쟁을 겪지 않아 유적 보존이 비교적 양호했던 천년고도 경주가 중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유는 조선에 상무(尙武)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 여겼다. 상무 하면 화랑이고 화랑은 신라였기 때문에 경주가 수학여행의 단골 코스가 된 것이다.

학생들을 국가발전의 도구로 인식한 그들의 사고방식은 비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개발제한에 묶여 있어 외려 피해를 보고 있는 경주. 석굴암의 금강역사가 태권도의 상징인데, 태권도 하면 화랑인데, 정치적 희생양으로 세계 태권도 공원을 놓치고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을 선택한 경주. 그런 경주를 경상도였기 때문이라는 말은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천년고도 경주와 경주 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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