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울진신문이 집으로 배달되면 내 글을 스마트 폰 카메라로 찍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카톡으로 보낸다. 자랑삼아, 안부를 겸해서 보내놓지만 답변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대부분 건성으로 ‘수고가 많네’ 정도의 인사말이거나, 기껏해야 엄지를 치켜세운 스티커 사진이 반응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번,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가 울진신문에 실려 사람들에게 읽히고 나서 몇 군데서 전화가 왔다. 40년이나 지난 옛일들을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냐며, 내 기억력을 칭찬하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쥐꼬리도 가져가 봤는데 그깟 연탄재가 무슨 대수라고 호들갑이냐는 선배도 있었다. 개중에는 “무명저고리, 실화냐? 너 옛날에 완전 지지리 궁상이었구나.”며, 도발(?) 해 오는 '팩트(fact) 폭력배‘ 도 있었다.
 

얼마 전에 고향 어르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제 때 만주로 떠났던 먼 친척 분의 후손이 조상님의 고향을 찾아왔는데, 성씨가 임(林)이어서 혹시 나를 통하면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연락한 거라 했다. 일제강점기 때 떠난 사람을 1960년대에 태어난 나더러 알아보라니, 고향 어르신들 눈에도 내가 그만큼 고리타분한 젊은이로 비쳤던가 보다. 중국에서 왔다는 분과 통화해 보니, 고향에 살았던 조상들의 함자와 옛날 주소를 알고 있었다. 워낙 오래된 세월이라 그것만 가지고는 짐작할 수 없어 족보에서 인척관계를 찾아 알려드리겠노라 답변을 하고 끊었다.

한문을 잘 안다고 해도 둘째 이하는 집안에서 내려온 족보를 아무 때나 들춰 볼 수 없는 게 우리네 정서다. 족보나 고문서는 무조건 장남 집에 있게 마련, 차남들은 형님의 허락을 받아야 겨우 감상(?) 할 수 있다.

그날 저녁 형님 댁에 있는 족보를 뒤져보았으나 먼 친척이 불러준 이름은 없었다. 증조부의 4촌들 함자가 나열된 부분을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면서, 호적에 올린 이름과 족보에 적힌 이름이 달라서 그렇다는 것과, 불러준 주소와 함자로 보아 짐작이 가는 분에 표시를 해주고, 더 이상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사진>의 문서는 내가 그 일을 하던 도중 족보를 넣어둔 고리짝 안에서 발견한 것들이다. <사진1>과 <사진2>는 조선시대 호적 문서다. 호적의 주인공은 내 고고조부(高高祖父)다. 초시(初試)에 급제해서 우리 집은 ‘초수’ 댁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초수는 초시의 사투리다. 내 형님께 부탁해서 저 두 장을 얻어다가 <사진1>은 표구를 맡겼는데, 표구집 사장님은 이렇게 좋은 한지(韓紙)를 처음 봤다고 했다.

보관상태가 나빴던 탓에 사진으로는 확인이 불가능 하겠지만, 한지 두께가 거의 1mm에 가까운데 티 하나 없이 매끈하다. 조선후기 철종 6년(1855년) 때 문서다. 그에 반해 <사진2>는 얼핏 보아도 질이 훨씬 떨어짐을 알 수 있다. 글씨도 품이 낮고 낙관과 인장도 허술하기 그지없다. 종이 질은 말할 것도 없다. 두께도 절반이고 군데군데 닥종이 올이 드러난다. 1864년 문서다. 저 두 문서만 봐도 조선의 몰락을 느낄 수 있다. 불과 10년 만에 나라도 저렇게 저물 수 있는 거였고 초시 댁도 기울었을 것이다.

<사진3>은 백년이 넘은 성경책이다. 사용자는 내 조부였다. 지면의 한계로 여기 싣지 못했지만, 문서함에는 <노동서원 학안(學案)>도 있다. 노동서원은 기성면 황보리에 있던 서원으로 평해군 유림들이 강학하던 곳인데 그 유림들 명단이 학안이다. 명단에는 선대(先代) 어른도 있었지만, 어느 집안 어른인지 짐작이 가는 분들도 있었다.
 

조선이 망할 때 그들의 후손들은 새로운 직업을 모색했다. 누구는 풍수를 선택해 대를 이었고, 또 누구는 한의학으로 성공했다. 내 조부는 기독교를 선택했다. 결김에 집안 당나무를 베어다 예배당을 지었다. 몸에 맞지 않는 선택은 집안을 괴롭혔다. 땅을 팔아 만주를 두 번씩이나 다녀봤지만 해답을 얻지 못했다. 껍데기뿐인 선비의 미련만 대를 이었고, 해마다 열두 번씩 제사를 지내며, 버티다가 고리타분한 손자 하나가 한문 나부랭이를 뒤적일 따름이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