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 봉산사(鳳山祠)에 봉안된 강이식 장군의 영정 |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 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문제가 침략할 야욕으로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그는 이와 같은 무례한 야만국에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강이식의 주장을 받아들여 싸울 것을 명하자, 그는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쳐부수었다. 603년에 수양제가 군사 100만으로 다시 침략해 왔을 때, 중신회의에서 요동성 일부를 떼어주고 강화할 것을 논의 했으나, 그는 또 싸울 것을 주장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 지에서 수양제 군을 대파한 일세의 명장이었다.
강(姜)씨의 본관은 진주, 금천, 안동, 백천 등 9본이 있으나, 모두가 대종인 진주강씨의 지파로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은 모든 강씨의 도시조가 된다. 시조의 묘소는 만주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으며, 음력 4월 10일에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진주 진양지방에서의 강(姜), 하(河), 정(鄭)씨 3성은 대성으로 일컬어지는데, 진주강씨는 진주하씨와 더불어 이 지방의 토성이다.
강(姜)씨는 우리나라 3백여개의 성씨 가운데, 여섯 번 째 가는 대성으로 모두 약 30만 가구에 총인구의 약 2.4%를 차지하는 약 1백만명의 대족속을 이룬다. 울진군지 기록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1588년(선조21년) 강설백(姜雪白)이 한림(翰林)의 벼슬을 버리고 충주로부터 들어 온 것이 진주강씨의 울진 최초입향이다.
그러나 강설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기술이 없고, 1670년 (현종11)년에 들어 온 강모로(姜模老)와 뒤이어 숙종 때 들어온 강봉일(姜奉一) 대해서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강모로는 진주에서 울진 후포로 들어 와 종사랑(從仕郞)을 하였고, 묘소는 후포 누치백사장(累峙白沙場)에 있고, 자손은 울진 후포 원남에 분포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강봉일에 대해서는 벼슬이 개성유수였고,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로서 화를 피하여 입향하였고, 묘소는 평해읍 비량동 서막수곡(西幕壽谷) 원등(原嶝)에 있고, 자손은 온정 평해와 서울 부산 대구 등에 분포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울진에서의 진주강씨는 전국적인 세력과는 달리 약 240가구에 700명 남짓 살아 울진의 본관별 성씨 인구순위 20위에 그치는데, 울진에서의 진주강씨 집성촌은 온정면 선구리였다.
강씨는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남, 부산 지방에 많이 살며, 그 다음이 전남, 경북, 전북 지방에서 많이 살고 있다. 진주강씨는 조선시대에만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5명, 대제학 1명, 원수 및 장군 25명, 명신과 공신 51명, 문과급제자 227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가문이 번성하였다.
현 울진군 진주강씨 강두희(66세) 종친회장에 따르면, 약 20년 전 자신을 비롯 초대회장을 역임했던 후포의 강성희씨, 후포의 강태봉 새마을금고이사장, 울진읍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였던 故 강만석씨, 매화에 강순석씨, 등이 나서 종친회를 결성하여다 한다. 이후 수년전까지 울진의 연호정 등지에서 약 200여명이 참석하는 문중회의를 여는가 하면, 버스를 대절한 30~100여명의 울진종친들은 진주의 봉산사로 가 시조 제사에 참배를 하였다 한다.
그러나 요즈음 재정 빈약 등의 사유로 울진의 종친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조상들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다며, 조만간 뜻있는 종친들을 한자리에 모아 종친회 복구에 나설것이라고... 울진의 인물로는 자유당시절 강상일 도의원이 있었고, 현재는 대한변협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강창웅변호사, 그리고 전 교육개발원 원장을 지낸 강무섭씨 등이 울진출신으로서 가문을 빛낸 사람들이라고 한다.
진주강씨의 분파는 크게 박사공 삼형제파, 은열공파, 인헌공파인데, 이 중 박사공 삼형제파는 다시 박사공파, 소감공파, 시중공파로 구분되고, 3형제파가 진주강씨의 3대 맥으로 그 후손이 진주강씨의 대종을 이룬다. -박사공파(博士公派) 중시조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은 1274년(고려 원종 15년) 통신사서상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단종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려질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 강시영(姜時永), 강문형(姜文馨), 강난형(姜蘭馨), 강우형(姜友馨), 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가로 꼽힌다. 이 밖에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姜弘重)이 있다. -소감공파(少監公派) 중시조 강위용(姜渭庸)은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다. -시중공파(侍中公派) 강원용(姜遠庸)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중시조 강민첨(姜民瞻)은 인헌공파의 파조 강감찬과 더불어 자주대첩의 전공으로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명장이다.
이 파에서는 특히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와 강노(姜老)가 유명하다. 강백년은 조선 현종 때 관찰사, 예조판서,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는데, 문명(文名)이 높았다. 그의 아들 강현은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좌찬성,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강현의 아들 강세황은 한성판윤과 각조 참판을 거쳤으며, 시서화(詩書畵)로 더 유명하였다. 강노는 강세황의 증손자로, 철종 때 대사간,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