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교수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라고 시작되는 나의 시 「너와집 한 채」가 씌어진 것도 벌써 십 수년 저쪽이던가.

행정구역조차 멋대로 바꾸어 ‘강원남도 울진군’이라고 노래했던 까닭은 고향이 어느새 한갓 추억이 되어버렸던 탓이었다.

그렇다. 출향민에게 고향이란 삶의 현장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기억으로 아득하고 생생해지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그 ‘강원도 울진군’ 시절에 나는 울진군에서 태어나 유소년기를 살아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에 무작정 탈주를 꿈꾸지 않았다면, 아직도 나는 태백산맥의 발부리가 파도에 발을 씻는 그곳에서 한 생을 보내고 있었을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후포면의 일부가 되어버린 삼율 2리가 내 태생지이니, 그곳도 봄가을 할 것 없이 ‘후리 그물질’이 성행하던 고장이다.

 

다만 동네 앞에 넓지 않은 들이 있었고, 조금 걸어나가면 동해와 긴 백사장을 사이에 두고 만곡처럼 휘어진 해안선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어린 시절의 가난 또한 그 바다 삶의 흥청스러움을 함께 간직했었다. 원양에서 쫓겨온 멸치 떼들이 시커멓게 동네 앞 바다를 물들이면 마을 장정들은 부리나케 그물을 실은 배를 띄워 고기떼를 가두고, 논밭에서 일하다 말고 뛰어온 마을 사람들은 함께 밧줄에 매달려 그물의 양끝을 끌어당겼다.

그물 폭이 좁혀질수록 찢어져라 요동하던 고기떼의 장관으로 하여 내 유년은 또 얼마나 생동했었던가.

 

두레의 짓으로 나눈 제 몫의 생선을 광주리에 받아 머리에 이고, 온통 비린내나는 웃음꽃을 피우며 흩어지던 아낙들의 모습은 뇌리에 새겨져 지금도 펄펄뛴다.

그 모래사장에서 여름밤이면 모기떼를 피해 멍석을 깔고 군용담요를 덮고 잠을 청하곤 했다.

낮 동안 뜨거운 햇살을 머금고 달구어진 모랫벌은 등을 대고 누우면 새벽녘까지 따스했다.

눈 높이로 숱한 별들이 반짝이고, 은하가 이마를 치고 귀밑께로 조금 더 기울면 어느새 선들바람 불어와 여름은 끝이 났다.

 

그런 동해도 어느 순간에는 돌변하는 광포한 힘을 간직하고 있어서 특별히 고향 사람들에게는 바다 자체가 외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해마다 펼쳐지던 별신굿 마당도 잊을 수가 없다. 풍어를 기원해서 동해안 유명 무당들이 모여 온갖 굿거리를 펼치던 사흘 밤낮의 그 축제.

“어허 가래요/ 그물코가 삼천리라 해도/ 어허 가래요 걸릴 날이 있다더니….”

고향은 혈육이라는 질긴 인연으로, 고생을 보람의 꽃을 피워내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 늙은 부모님이 그곳을 지키시는 한 언제나 삶의 원형 같은 곳으로 간직된다.

 

고향에는 지나간 시절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생생하고 무심코 손가락을 베었던 사금파리 같은 유년 시절의 추억이 묻혀있다.

 

오만가지 삶의 시래기와 얽혀서 적당히 탈색되거나 마모될 법도 하건만, 그곳에서의 추억은 파헤칠수록 망각을 거스르는 수많은 파편들로 쟁그랑거리면서 의식의 표면 위로 닦여 올라온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면서 오히려 날을 세우고 더욱 날카로워지는 그 기억들은 아무리 남루하더라도 현실적 분열과 차별이 없었던 시절 속으로 다시 갈무리된다.

마음의 울도 담도 없이 인정이 넘치던 장소, 어떤 새로움도 오래된 것과 통합되던 그런 곳이 고향인 것이다.

 

나는 한 해에도 몇 차례 고향에 다녀오곤 한다. 어머님이 아직도 그곳에 생존해 계신 까닭이다.

그럼에도 고향 나들이가 남들의 눈에 띄는 것을 애써 피하려고만 한다. 알게 모르게 앙금처럼 가라앉은 마음의 상처와 빚 때문이다.

고향을 말할 필요가 없는 자리에서조차 당당하게 울진 사람임을 밝히는 평소의 태도와는 사뭇 어긋나지만, 그 모순은 세월을 두고서도 바로잡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나는 지금 대양을 떠도는 연어, 아직도 고향이라는 물맛에 수구초심을 대고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회유해 가는 여정에 있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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