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요즘 항간에는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정치권에서는 저마다 아전인수(我田引水)하는 셈으로 한마디씩 난체하며 던지기도 하고, 영화를 본 일반관객들도 영화 한 편 관람에 마치 역사를 관통한 듯 오늘날 우리나라 상황에 빗대 자기 나름으로 비판하고 비난한다. 방향 잃은 비난의 화살들이 공중에 난무하는 이 현실 자체가 남한산성임을 자신들만 모른다.

나는 작가나 연예인들, 예컨대 예술인들이 작품으로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싫어한다. 김훈의 원작 소설 남한산성은 최근 100쇄를 넘었다. 그럼에도 김훈이 남한산성의 역사성을 가지고 한국의 현실정치에 비유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100쇄 특별판을 기념하여 새로 ‘작가의 못다한 말’을 덧붙였다. 그 안에는 김훈이라는 작가의 진솔성을 엿보게 하는 흥미 있는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한번은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KTX 열차를 탔는데, 우연하게도 그 기차에는 김대중 前대통령이 타고 있었다. 남한산성 작가 김훈이 같은 기차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김 前대통령은 그를 자신이 타고 있는 객차로 불러 마주 앉게 되었는데 초면이었다고 한다.

소설 남한산성을 속속들이 읽은 듯, 김 前대통령이 물었다. “김 작가는 김상헌과 최명길 둘 중에 누구 편이시오.” “작가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대답을 드렸더니, 김 前대통령은 “나는 최명길을 긍정하오. 이건 김상헌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오.”라고 했다. 김훈은 속으로 ‘불굴의 민주투사’로 평생을 사신 분이 이념보다 실리를 선택한 최명길을 높게 평가한다는 고백에 놀랐지만, 자신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고 한다.

김훈의 이 에피소드를 읽고 정작 놀란 사람들은 나 같은 보통사람들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김대중 前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것을 모르는 성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 前대통령의 ‘유비무환(有備無患)’이나 김영삼 前대통령의 ‘대도무문(大道無門)’만큼 고유화(固有化) 된 사자성어다. 김 前대통령의 햇볕정책도 실사구시에 입각한 대북정책으로 공표했었다. 또 실사구시의 정치인 최명길이 조선시대 가장 훌륭한 정치가 중 한 명이라는 말도 몇 번 했었다. 그런데 김훈 작가는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화를 통해서 김훈 작가가 남한산성을 쓴 의도는 한국 현실정치와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만약 오늘날의 한국 정치에 빗대려고 썼다면 김 前대통령의 실사구시를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김훈 작가를 두고 네 편이니 내 편이니 논한다.

작품을 끌어다가 최명길이 내 편이니 김상헌이 내 편이니 편을 가른다. 최명길이 내편이라 했다가 김대중 前대통령의 실사구시 때문에 화살의 방향이 헷갈리다가 엉뚱한 데로 날아간다. 이번에는 김상헌이 이쪽이라 했다가 그 후손들이 세도정치의 본거지인 後안동김씨라는 말을 듣고 저쪽이라 우긴다.

이런 폐해는 그동안 우리나라 소설이나 영화가 예술을 빙자하여 여론을 이끄는 데 큰 몫을 차지해왔고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공평해야할 미디어 예술이 너무나 흔하게, 마치 여론을 이끄는 역할이 예술의 목적인 듯 당당하게 여론을 조작한다. 대놓고 조작을 못할 때는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인들의 미담이나 영웅담에 슬쩍 침을 바르거나 오물을 묻혀 걸레를 만드는 수법을 쓴다.

이미 오물이 묻어 걸레가 된 바에 아무리 빨아도 행주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네편 내편 갈라서 그런 선동과 조작이 난무하고 내편 아닌 네편이 오랑케보다 더 미운 그것이 역사의 남한산성이다. 내편을 긍정한다는 뜻이 상대를 부정한다는 말이 아님을 모두가 인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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