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와 함께 한... 불영사 포교당 동림사
1953년 김용식 신도 시주 창건, 유치원도 운영

 

“1970년대 동림사는 공부의 장소, 만남의 장소였다. 어떤 이는 결혼식의 장소였고, 전쟁의 상흔을 되새겨 주게 하는 현충일행사의 장소이기도 했다. 청소년기 학생들에게는 동북불교연합회(울진, 영덕, 영해)가 결성되어 자연스럽게 인근지역과 종교를 초월한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동림사와 지역사회
 

불영사포교당은 혜진스님의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을 기르기 위한 원력으로 불교유치원이 1950년 중반 시작하여 교육의 장이 되었다. 근현대의 불교를 책임지고 이끌어 온 스님들의 힘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 불영사포교당을 만들어 갔다.

1960년 초 대흥사의 대웅전이, 1973년 석탑이 이건되어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유치원 다니던 아이들이 졸업하고 성장하여 청소년불교동아리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고, 사세가 확장되면서 불영사포교당은 울진지역의 포교당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1970년대, 많은 외부 활동이 많이 없던 시절, 동림사는 공부의 장소, 만남의 장소, 희망이 넘치는 장소였다. 어떤 이에게는 꿈과 희망의 시작점인 결혼의 장소였고, 어떤 이에게는 전쟁의 상흔을 되새겨 주게 하는 현충일행사의 장이기도 했다. 청소년기 학생들에게는 동북불교연합회(울진, 영덕, 영해)가 결성되어 자연스럽게 인근지역과 종교를 초월한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종소리를 들으면 기도하는 시간인 줄 알고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모여들어 함께 기도하고 마음 아픈 사람에게는 마음을 달래주며 동림사는 그렇게 이웃과 함께 했다.

1979년 말에서 1980년대 초에 대웅전 기와 번와와 요사채 등 불사가 이루어져 보다 나은 환경에서의 신행생활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진포교당이라는 공간에서 위안을 받았을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2년, 그동안 변화 없던 동림사에 대 변혁이 이루어졌다. 시대를 이기지 못한 공양간 건물에서는 비가 오면 몇 개의 다라이가 놓여져만 했다. 그래서 한걸음 더 다가서는 포교를 위해 불영사 주지 일운스님(현 불영사 회주)의 원력으로 오래된 건물(요사채, 공양간, 화장실)를 헐고 새롭게 심전문화복지회관을 건립하여 현재 다문화가정지원사업과 상담사업 그리고 노인교실이 봄학기 가을학기로 편성되어 현재 제9기가 운영 중이다. 관내 읍면소재지에 거주하는 대상자 각 2인씩 20명을 선정하여 매년 후원하고 있고, 또한 재가센터를 열어 방문요양 및 노인돌봄사업을 진행 중이다.
 

2017년 5월 동림사의 모든 불자님들의 동참으로 담장의 일부와 일주문이 건립되어 비로소 사격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도 수시로 보듬어주고 다듬어 주어야 하듯 건물도 마찬가지다. 사격은 갖추어졌으나, 대웅전은 이미 노후되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동림사는 포교당이라는 이름으로 반세기를 훌쩍 넘겼다. 우리 부모님들의, 형제들의, 친구들의,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함께했던 아름다운 기억의 장소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이 또 그 아이들의 끝없는 아이들이 누려야 할 가치의 공간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안식처이다. 울진지역민과 함께한 세월, 그리고 함께할 시간들이 기다려진다.

 

◆동림사와 함께한 인물
 

불영사포교당으로 시작한 그때부터 근현대 불교를 이끈 주역 (혜진스님, 영암스님, 벽암스님, 정오스님, 천룡스님)들이 포교당에 주석하시며,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며 지역민들과 애환을 함께했다.

① 혜진스님(1908~1984)
훤칠한 키에 체격도 좋고 겸손함에 학식과 훌륭한 인품까지 갖추신 분이며, 출가이전 어린 나이에 사서삼경 논어 맹자 등 한학을 두루 섭력하고, 만주 유학까지 한 학구파에 늘 삼의일발(三衣一鉢)로 청빈하게 사신 분이다.

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시주물을 아껴 써라”고 당부했다. 1950년대 말, 불영사 공양간에서 스님이 죽을 끓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 젊은 스님이 물었다. “스님, 수채 구멍에 있던 밥알로 죽을 끓여서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하하. 밥알도 다 시주물(施主物)인데,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아니, 탈이라도 나면 어떡하십니까” 방금 우물가 수채 구멍에 있던 밥을 주어와 죽을 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님은 개의치 않고 미소까지 보이며 죽을 끓여 드셨다. 다른 대중들에게는 알리지 말라면서….

또한 스님은 1950년 중반에 불교유치원을 개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님과 주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절에서 무슨 유치원을 한다고 그래.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그만두라고 하쇼!”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드러나 있던 시절이기에 ‘불교유치원’에 대한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그러나 불영사 주지 소임을 맡은 스님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당장 먹고 살기 힘들다고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을 길러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영사포교당에 유치원은 시작됐고, 얼마 가지 않아 마을 주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불교유치원을 졸업한 원아들은 장성한 지금 행복한 기억들을 꺼내고 있다.
정화불사에 앞장서는 한편 종단 외호에 사명감을 갖고 있던 스님은 귀감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②영암스님(박기종) - 스님은 시은(施恩)이 소중함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실천한 ‘불교계의 청백리’이다.

사찰의 공무로 외출하고 돌아와서 남은 여비는 동전까지 사중(寺中)에 반납했으며, 주머니가 둘 달린 승복을 입고 오른쪽은 공금, 왼쪽은 사비(私費)를 넣어 공사를 엄격히 구별하였다.

월정사에 주석할 당시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강릉에 다녀오다 사비를 다 사용했다.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공금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고, 강릉에서 걸어서 대관령을 넘어 월정사까지 돌아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청렴결백의 삶을 살았던 스님은 열 가지를 멀리하는 ‘십부지’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십부지(십(十不知)는 간식, 차, 과일, 떡, 낮잠, 구경, 여행, 화초, 서화, 골동품이다. 다른 곳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수행과 정진에 몰두하겠다는 스님의 원력이 담겨 있다.

살림이 궁핍했던 시절, 절인 배추에 다시 소금을 뿌리는 고육지책을 써야했던 시절에 삼보정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불영사 또한 역사를 남기기 위해 월정사 한암스님을 찾아가 글을 부탁하여 사적비가 남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허망하니 욕심을 버려라. 원래 상(相)이 없어 모든 것은 허망한데 우리 중생들은 뭘 보고 기쁘고, 뭘 보고 슬퍼하는지 모르겠다. … 결국 기쁨도 가짜요, 슬픔도 가짜요, 울음도 가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님의 어록에서


◆동림사의 창건과 발자취
 

울진은 동해 중부권에 위치해 있다. 동으로 망망대해와 남북과 서는 굽이굽이를 돌아야 교류가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으로는 가까운 현동에서 울진으로 물물교환하기 위해서는 20~30명 있어야 움직였다는 시절, 그만한 인원이 모이지 않으면, 산적이나 큰 동물에게 피해를 당했다던 그 때에 불영사포교당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불영사에서 울진에 볼일이 있어서 나왔다가 하루에 돌아갈 수 없기에, 공부하러 오신 스님들이 하루 만에 불영사에 갈 수 없기에, 불자들이 쉽게 사찰을 접할 수 없기에... 등의 이유로 당시의 불영사 주지 김용호가 신도 김용식으로부터 시주를 받아 일제강점기에 요정이었던 불로관을 구입 보수하여 불영사의 포교당으로 영암스님(박기종)을 주석케하고, 1953년 10월 6일 출발하였다.
 

1962년 포교가 활발해지고, 신도수가 증가하여 무송스님(박인봉)이 대한불교조계종에 등록하여 독립사찰이 되었다. 1963년 행정권역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변경됨에 따라, 교구본사가 월정사에서 불국사 관할로 되었다.

(1) 동림사의 대웅전 -『울진군지』나 동림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내용으로 볼 때, 동림사의 대웅전은 울진읍 대흥리에 세워졌던 대흥사가 폐사가 되면서 현 위치로 1963년 10월에 이전되었다.
 

울진군 대흥리에 세워졌던 대흥사는 조선후기 문인 안석경(1718~1774)의 문집인 삽교집 1권에 대흥사에서의 감회와 경치를 서술하였으며,

정범조(1723~1801)의 활산집에도 대흥사차판상운(大興寺次板上韻)이라는 시를 찾아볼 수 있으며, 치암 남경희(1748~1812)의 시에서는 ‘起雲樓’라는 누각 건물이 나오는데, 이것은 대흥사 대웅전 전면에 위치하였던 문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울진현 고지도를 살펴보면 불영사와 함께 대흥사가 표기되어있다. -<여지도(1736-1767년 사이 제작) - 광여도(1800년대 초반 제작) - 울진현 지방지도(1872년 제작) -1917년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

이와 같이 대흥사는 문집과 지도를 통해 18~19세기 당시 사격이 잘 유지되었으며, 근대까지도 사찰이 유지되었음이 확인되며, 현재 구전으로 내려오는 대흥사지 주변의 지명들을(암재, 노전터, 탑골, 불당골, 인지감-인지암, 도장골-도량골, 불미당골 등) 볼 때, 사세(寺勢)가 짐작되어진다.

현재 대웅전은 1979년과 1999년에 일부 기와 번와를 하였는데, 이중에 동치4년(1885년) 암기와와 숫기와가 있어 고종 2년에도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의 건축은 다포계 양식으로 전반적으로 화려한 편이다. 이는 특히 내부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내부의 출목이 6개까지 빠져나가 있고, 그 뒤로 다시 3출목이 뻗어 중보를 받치는 대공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 내부공간의 상승감이 뛰어나고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 그리고 대들보와 중보 사이의 코끼리 조각, 고주를 연결하는 창방과 보아지 부분에 황룡과 청룡이 교차하도록 조각한 점, 외기 아래 연화달동자 설치 등은 장식성에도 우수함을 나타낸다.

(2)삼층석탑 - 이 탑이 옮기기 전 조사된 자료에는 기단 상층갑석 이하 부재가 담에 매몰되었을 뿐만 아니라, 산란되었음으로 원상은 크게 변동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고 흩어져 있는 부재들을 모아 1973년도에 현 위치로 옮겨왔다.
 

이 탑은 명갈색 화강암으로 조성된 일반형 석탑이며, 기단부의 면석이 上下가 바뀌어 있고 內外가 바뀌어 있어서 2014년 6월에 上下가 바뀐 면석은 바로잡고, 內外가 바뀐 면석은 바로잡으려고 하였으나,

내외가 바뀐 것이 아니고 기단 갑석을 사용한 것이라 추정되어 대웅전 앞에 탑의 다른 부재와 함께 두고, 면석을 새로 만들어 조성하였다.

이 탑의 조성시기는 삼국시대, 나말여초, 고려초기, 고려중기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지만 4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전각의 반전이 뚜렷하며, 1층 탑신의 민흘림 요소 등이 있어 고려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써 동림사는 1금당 1탑의 가람배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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