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연 시인.전직 교장(평해출신, 현 대구거주)

▶이대연 시인
울진 교육연구소가 성류굴을 개굴하고 세상에 알린지도 어언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관광명소로 자리굳힌 성류굴의 개발 내역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50년 중반에 울진교육청(당시 교육감 방병주)은 전국 7번째, 강원도에서는 첫 번째로 산하에 교육연구기관을 설치했다.

여기에 4명의 현직 교사를 발탁, 연구원으로 위촉 발령하여 새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연구 검토하고 현장교육을 돕는 「울진교육연구소」를 탄생케 한 것이다.
또 연구소는 교육신문(등사신문)을 발간 관내 학교뿐만 아니라 전국 교육기관에 배포하여 선진 울진교육의 위세를 떨치게 하여 강원 남단의 교육의 질을 한껏 높이는 한편, 향토자원 개발에도 손을 대어 관광 울진의 면모를 다지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연구소는 성류굴을 뚫었고 성류굴은 지하 금강으로 발돋움 한 것이다.
성류굴(聖留窟).

동굴에 들어가면 흰 강아지가 되어 나오느니, 굴속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산다느니, 감히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던 난공불락의 성류굴을 연구소는 일본 지질학회의 자문을 얻어 마침내 그 괴굴(怪窟)의 베일을 벗겼던 것이다.

그날이 1960년 10월 6일이다.
성류굴은 이렇게 울진교육연구소 4명의 직원에 의하여 공략이 되고 그 후 네 차례의 탐굴로 3지(池) 12광장의 내부 모습을 세상에 알렸다.

또 성류굴이 여느 동굴과는 다른 임란(壬亂)의 슬픈 역사를 지닌 사실을 알아내고 당시 100여명의 주민이 왜병의 방화로 굴 안에서 질식사한 사실(史實)을 확인한 바, 그 근거로 ‘마의 심연’ 모서리 다락 암반에서 아기 손뼈 화석을 채취하고 이어 그 부근에서 깨어진 항아리 조각과 숯덩이, 동으로 만든 숟가락, 사금파리들을 수습하고 머리숙여 그들의 영혼을 달래기도 했다.

「연구소와 성류굴」.
그 연구소가 있었기에 오늘의 성류굴이 있고, 성류굴이 날로 번창한다는 소식이기에 고향은 더욱 그립다.
그후 울진군이 강원도와 경북도로 편입되어 연구소는 해체가 되고, 성류굴의 관리권이 교육청에서 군청으로 이관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고향!
고향 그리는 정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에게는 유독 두고 온(66년 출향) 연구소와 성류굴을 잊지 못한다. 배고픈 시절 교육연구에 몰두하고 등사신문을 발간하면서 감히 성류굴 탐사에 도전한 내 젊음이 있었기에 말이다.

세월이 흘렀다. 개굴 당시 맨 앞에 선 김영기(장학사·근남)이 서울에 사신다는 소문만 있고, 둘째로 참모역할을 한 이원태(원남출신)는 경기도 분당에서 살고, 패철 스케치북 작도 준비를 하며 세 번째로 따르던 이대연(평해출신·필자)과, 새끼줄을 조종하며 후미에서 구축함 역할을 한 장종욱(울진읍 출신)은 대구에서 살고 있는데 이들이 연구소와 성류굴을 운영하고 개척한 장본인이다.

이들 모두가 이제 고희를 뛰어넘어 황혼길에 섰다. 그래서 성류굴의 작도 원본과 관계 자료들을 울진문화원으로 보내고(굴 내부도 원본과 기록물, 개굴당시 필자의 사진 1장), 자칫 사라져 갈 50년 후반의 울진교육의 모습과 60년 초반의 성류굴 개척의 일단을 고향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그리고 뒷날 탐사(探査)시 장비를 들고 달려온 김진환(전업), 이보기(신문), 전병강(사진업), 이정모(신문)님들의 안부를 묻는다.
편지는 미사여구(美辭麗句)라야 재미와 맛이 있는데 딱딱한 과거의 기록을 보내게 되어 미안하다.

고향 울진의 발전과 후배님들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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