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남난희
생각해보니까 참 세월도 많이 흘렀다. 성장기만 겨우 보낸 고향이니까 많은 추억이 있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리운 나의 유년기와 성장기의 기억들이 떠올라서 가끔 혼자 웃기도 한다.
우리집에서 내가 다닌 초등학교까지는 약 20여분 걸어가면 되는 소곡국민학교였는데 이제는 우리의 모교는 폐교가 되어서 쓸쓸한 세월을 보내는 것을 보면 나도 함께 쓸쓸해지곤 한다.

한때는 한 학년에 두 학급이 60명씩 가득 찬 곳이었는데,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로 다 가 버린 것일까.
그때는 그렇게 커 보이던 학교 건물이 쪼그라들어 버린 할머니처럼 작고 볼품없는 모습 또한 안쓰럽기 그지없다.

지금은 부모님 산소에 가면 내려다 보이는 학교 교정을 보며 생각에 잠겨 본다.
나로서는 집이 아닌 다른 세상을 최초로 만난 곳이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운 곳이 그곳이다. 참 고맙고 애틋한 그리운 공간인 것이다. 나뿐만 아니고 우리 아버지, 삼촌들, 고모들, 우리 형제들의 공간이기도 했던 곳이다.

우리 모두는 그 공간에서 정해진 만큼의 세월을 보낸 후 상급학교에 가거나 못가거나 했는데 그 일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우리집에서 중학교가 있는 죽변이나 울진을 가려면 최소 8km에서 10km 씩은 가야만 했는데 그 길을 가고 와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일부는 자취를 했지만 내가 중학교를 다닐 당시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걸어서 통학을 하는 추세였다.

자전거 통학은 우리 다음 몇 년 후부터 였다. 우리는 순전히 왕복 80여리를 걸어서 통학을 했으니까 하루에 통학을 위해 걸리는 시간만 네시간에서 다섯시간이다. 그야말로 샛별보기 운동이었다.
새벽에 아직 별이 있을 때 집을 나서야 하고, 저녁에 별이 뜨고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는 고된 일상이었다.

통학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는데 공부 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공부는 고사하고 자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학교도 따라가야 하고 시험도 쳐야하니까 흉내로나마 공부는 해야 했는데, 우리의 공부라는 것이 참 진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아침 등교시간을 맞춰서 멀리 있는 사람은 빨리 나오고 그 거리만큼의 시간을 맞춰서 모인 통학생들이 갈수록 그 무리가 많아져서 학교에 도착 할 즈음은 100여명 가까운 무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곡, 소야, 섭실, 사계, 무시골 이렇게 한두명이 십여명이 되고 범상골, 잿범상골, 동막, 감재를 지나면서 그 수는 삼사십명으로 늘다가 화성으로 가면서 백여명에 이르는데 그 무리들 제일 앞에는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 기동이 오빠가 손에 단어장 또는 노트를 들고 가면 그 뒤를 줄줄이 손에 단어장이나 노트를 든 무리들이 따르는 것이다.
물론 그 손에 든 단어장으로 단어도 외고 전날 필기한 노트를 암기해서 1~2등씩 하는 우리 고모같은 사람도 무리중에는 있었고, 나처럼 건성으로 들고만 다니는 무리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습관이라고 어쩌다 집에서 공부라도 할려고 하면 가만히 앉아서는 읽히지도, 외워지지도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방에서 책을 들고 왔다갔다 하며 공부를 해야만 조금이나마 공부랍시고 할 수 있었다.그런 성장기를 거쳐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요즘도 가끔 고향에 가면 그 길을 지나는데 그 많은 발자욱은 흔적도 없고 차를 위한 길이 되어 버렸고, 나 또한 차로 지나치는 곳이지만 그래도 그때가 아련히 그리운 것이다.


남난희씨는...>>>>>

-중학교 졸업때까지 울진에 살았음.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봉 등정
-요즘은 지리산 화개골에서 작은 농사도 짓고 차도 만들면서 생활하고 있음.

[저서] 하얀 능선에 서면(수문출판사), 낮은 산이 낫다(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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