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임명룡 서울지사장

 


파란만장 인생 고수(高手)를 만나다


가난과 역경 이긴 해피엔딩 휴먼스토리

장기 안목 주상복합 건축업으로 사업 일궈

노년에는 고향 돌아와 문화사업 지원할 것


 

 

단순한 암기 공부는 퀴즈왕일 뿐, 프로의 공부는 시간과 함께 안으로부터 축적된다.

그래서 프로는 내공이다. 무술을 대표하는 쿵푸는 한자로 功夫(공부)다.

고수가 되려면 무수한 단련(鍛鍊)과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인지 대만에서는 功夫를 시간이라는 의미로도 쓴다.

오랜만에 내공이 한 갑자가 넘는 인생공부의 고수를 만났다.
무술년에 새로 재경(在京) 울진군민회 회장을 맡게 된 전태수 (주)지산산업개발 대표 (이하 全회장) 다.

밖에는 소한(小寒) 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약속된 한정식집 온돌방은 푸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약속시간보다 한참 일찍 문을 열고 들어서는 全회장의 첫 인상은 한눈에 공력(功力)이 느껴지는 호인상(好人像)이다.

반갑게 악수를 하며 호방하게 웃는데 입 꼬리가 반달로 귀밑까지 올라간다. 어디서 본 듯한 웃음이라 떠올려보니 가수 남진이다. 닮았다고 했더니 많이 듣는 소리라 했다. 웃는 모습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꼭 닮았다. 게다가 달변이라 세 시간 식사를 같이 하며 인터뷰를 하는데, 시간이 언제 지나간 지 모를 정도였다.


◆다복한 방앗간 집 아들

울진읍 대흥리. 주소는 울진읍이지만 읍내(邑內)와는 수십 리 떨어진 마을이다. 대흥리 일명 ‘깨밭골’에서 방앗간과 목상(木商)을 운영하던 다복한 집에서 4남 3녀 중에 여섯째로 태어났다.
방앗간은 이동식 도정기(搗精機) 까지 갖추어 대흥리는 물론 금강송면 일부까지 도맡을 정도였고, 제무시(G.M.C)로 불리는 트럭까지 보유한 목상(木商)을 운영했으니 상당히 여유가 있던 집안이었다.

방앗간이며 목상에서 일하는 일꾼만 다섯인데, 울진 봉화 일대에 산판(山坂)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인부들이 수도 없이 드나들어 집안은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한마디로 크게 부족한 게 없던 유년시절이었다.

어려움은 단지 25리 밖에 신림초등학교가 있었다는 것 뿐. 너무 멀어서 마을 아이들은 아홉 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5학년이 될 때 마을에 대흥분교가 생겼다. 그러나 5,6학년은 본교에 계속 다녀야 했다. 억울해서 대흥리 5학년들은 몽땅 초등학교를 휴학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다.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데다 한해 늦게 중학교에 진학했다. 갑자기 변하는 환경은 학교문제만이 아니었다.


◆불행의 연속과 가난의 경험으로 단련(鍛鍊)

70년대를 접어들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산판 사업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값싼 수입목재로 대체되고, 산업화에 시멘트나 콘크리트가 건축의 주재(主材)가 되면서 한국 목재산업의 상징이었던 동명목재상사마저 쓰러지는 마당에 목상(木商)은 버틸 수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나라에서 통일벼 보급과 추곡수매를 시행하면서 도정(搗精)을 하지 않은 벼를 수매했기 때문에 방앗간의 수요가 사라져버렸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제무시(G.M.C) 트럭이 초등학교 수학여행단을 태웠다가 사고가 나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보았다.

당시는 초등학교에서도 수학여행이 있었는데, 가까운 온천을 당일로 다녀오는 정도였다. 교통편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시절이라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사고가 나서 아이들이 여럿 다쳤던 것이다. 불행은 연달았다. 남은 가산으로 중고 트럭 두 대를 더 구입하여 경주 보문단지 개발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이미 제무시(G.M.C)는 덤프트럭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방앗간에 목재상까지 운영하던 집안에서 학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한편으로 오늘날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全회장이 그 시절을 돌이키며 긍정하는 것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 나중에 자신이 사업을 할 때, 항상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투자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혼란 속에서도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조금씩 움트기 시작했다. 산판이나 방앗간 그리고 제무시 트럭은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예측 가능한 내리막길이었다. 아무튼 고등학교는 진학이 불투명했다.


◆동료이자 스승이었던 주기종 형님

어렵사리 울진종고에 진학은 했지만, 집에서는 학비를 댈 형편이 못됐다. 다행히 울진종고 실업반에는 ‘당번’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고학생(苦學生)들에게 학비를 내는 대신 실습시간에 선생님을 도와 실습조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으나 사춘기 때라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 때 全회장을 잡아준 사람이 전병식 울진신문 발행인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학생 사이에도 선후배는 엄격했다. 선배가 선생님보다 더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

田발행인도 나이는 동년배지만 두 해 선배, 어려울 수 있는 관계지만 둘은 한 방에서 하숙을 하며 절친한 사이가 된다. 집안 사정으로 방황하는 자신에 비해 田선배는 한층 더 어려운 형편임에도 언제나 당당하고 모범적이었다. 그를 보면서 많은 자신감을 얻었다. 절친한 선배가 졸업을 했을 때는 막막한 감마저 들었다고 한다.

그때 나타난 분이 前단양농협 지점장 주기종 형님이다. 구인사 총무원장이신 정산 스님의 동생이기도 하다. 10살이 많았던 주기종 형님은 오랜 스님 생활을 접고 학생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고수의 인생 선배가 나타난 것이다. 형님과 한방에서 지낸 덕분에 그의 인생공부는 일취월장했다.


◆상경(上京)후 전문대 전자공학과에 진학

서울에서 전자제품 도매업을 하던 누님과 형님의 도움으로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행운의 작은 날개가 생기기 시작했다. 졸업과 동시에 동양정밀 기술개발부에 취업이 됐다. 그때까지 체신부 소속이었던 전화전신이 통신공사로 분리되면서 전신(電信) 시스템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교환국 방식에서 DDD(장거리 자동 전화)로 전면 교체가 이뤄졌다.

그 중심에 동양정밀 기술개발부가 있었다. 국내외 최고의 기술진들로부터 첨단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혜화전화국 라인 전체를 내리고 새로운 시스템을 시험할 정도로 통신공사의 후원도 막대했다.

가끔은 개통식에서 기술진 대표로 테이프를 자르는 영광도 누렸다. 동양정밀은 국군 통신장비 납품까지 휩쓸었다. 개인적으로도 상당한 돈을 벌었는데 정권이 바뀌고 달라진 제도에 회사가 미처 대처하지 못하여 부도가 나고 말았다. 全회장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성남시에 제법 규모를 갖춘 식당을 차렸다. 한 때 성남시에서 맛집으로 유명했던 ‘전박사 숯불갈비’다. 올림픽 시즌을 거치면서 이른바 대박을 쳤다. 그러다가 IMF를 맞아 매출이 줄어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승승장구 그러나 건강에 이상신호

IMF 시절 한때 부동산 가격이 바닥을 칠 때, 성남시는 남아도는 분당 택지를 토지개발공사를 통해 좋은 조건에 분양했다. 미래 투자처를 살피던 全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분할매입을 해두었다가 집값이 폭등할 때 건축업을 시작했다. 차별화를 시도한 주택은 건축과 동시에 분양이 완료됐다.

소문이 퍼지면서 (주)지산산업개발의 주택은 짓기도 전에 분양이 끝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2010년 건축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 주상복합 건물까지 건축할 정도로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무리한 강행군에 체력이 버티지 못했다. 뇌졸중이 온 것이다. 다행히 초기여서 곧바로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이 일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큰 계기가 되었다. 좋아하던 술을 끊고 건강한 몸만들기에 돌입해 지금은 웬만한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30년 인연, 재경 울진군민회 회장 취임

全회장은 군민회에서 30년간 활동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울진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는 충절과 선비정신이라고 한다. 고려 복위운동이며 일제강점기 흥부 장터 만세운동으로 보여준 저항정신 등이 울진 사람들의 정서에 녹아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선비와 주민들이 역모죄로 참살되었고 일제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울진사람들의 무의식에는 핍박과 소외에 대한 저항이 있어 타지에서 자연스럽게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이 재경 울진군민회 형성의 바탕이 되었고, 오랫동안 단결과 규모면에서 서울의 여타지역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 재경 울진군민회도 근래 들어 위기에 봉착했다.

기존 회원들은 고령화로 참여가 부진하고 젊은 층은 세대 차이로 진입을 꺼린다. 원자력발전소 등에 취업하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상경하는 인구도 크게 줄었다. 회원 확보가 시급하다. 세대 간의 소통을 통해 회원을 유지하고 진입을 꺼리는 젊은 층을 안으로 유도하겠다고 했다. 젊은 층에게 직접 다가가는 스킨십을 최대한 늘려 친숙케 할 것이며,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미래지향적인 군민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한다.


◆언제나 힘이 된 가족, 봉사하는 노년(老年)이 되고 싶다.

가족은 부인과 1남 1녀다. 全회장은 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아들은 더 큰 세상을 꿈꾼다고 한다. 전도유망한 현대무용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은 시민사회에서 1대가 돈을 벌면 2대는 정치를 추구하고, 3대는 예술을 하려 한다고 했다. 잘 커준 아들에게 全회장은 D.PLACE라는 연습실을 선물했다. 딸은 뉴질랜드를 거쳐 미국 아리조나공대 우주항공과 기계공학을 전공하여 올해 5월 석사과정을 마친다. 온 가족이 고수(高手)다.

全회장은 자신의 성공 뒤에 항상 울진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실체도 없는 자부심이고 향수(鄕愁)지만 언제나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노년에는 울진의 문화사업에 지원할 생각이다. 먼저, 열악한 소외지역을 오늘의 울진으로 만들어 온 노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넓혀갈 계획이다.

다음은 불영계곡과 소광리 금강송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에도 적극 도울 예정이다. 끝으로 고향에는 된 휴식공간을 마련하여 선후배와 동창들이 언제든 편히 이용할 쉼터로 만들겠다고 했다.

세 시간 동안 펼쳐진 全회장의 인생역정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던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 학비를 걱정해야하는 가난한 사춘기, 미래가 보이지 않던 시절을 딛고 일어서 크게 성공을 이룬 해피엔딩의 휴먼스토리. 단련(鍛鍊)이란 원래 쇠를 불에 달궈 두드리고 담금질하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고통이 따른다는 의미다.

그러나 단련으로 쌓인 내공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여유로운 집에서 태어난 대로 꽃길만 걸었더라면, 과연 오늘날 같은 성공을 이룰 수 있었을까! 全회장에게 단련은 고통이자 성공의 바탕이 아니었을까.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