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사업 추진하는 중앙정부와 지자체 적대적

▶조영환대표
원자력 수거물 처리시설(방폐장) 부지선정의 문제는 중앙정부가 15여 년 동안이나 풀지 못한 국책사업이다. 군사정부 시절 같으면 전혀 고민하지 않아도 될 문제이지만, 민간정부에서는 풀지 못하는 숙제가 되었다. 소위 민주화 이후로 중앙정부의 역할은 축소되고 지역주민과 지방자치단체의 목소리만 높아졌다. 국민의 요구가 정부의 정책을 언제든지 뒤흔든다.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국책사업은 지역주민이나 지자체의 저항으로 종종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국책사업을 놓고 지자체가 중앙정부의 공공연한 적이 되기도 한다.

국가의 식량공급을 가름할 새만금 간척사업, 국가 에너지와 국방을 좌우할 방사능 폐기물 사업, 고속전철이나 지하철 사업 등도 환경보호의 이름으로 중단되거나 지체되고 있다. 옛날 군사정부 시설엔 불가능한 방해현상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국책사업의 중단 내지는 지체가 하나의 사회적 추세로 잡아가면서,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특히 환경보호는 전능의 권력으로 국가발전이나 개발사업들을 주춤거리게 만든다. 일례로 백두대간 보호의 목소리와 개발의 목소리가 충돌되어, 강원도의 도시마다 개발론자들과 환경론자들의 현수막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울진과 삼척에서도 방폐장 유치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에서 내건 현수막 전쟁을 한번 치렀다. 다소 번거롭기는 하지만, 지역주민이나 지방자치단체의 목소리가 반영된다는 점에서 국책사업들의 차질을 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차질의 정도가 지나치다.

지난 20여 년간 환경보호운동이 군정시대의 안보이념이나 문민시대의 민주화운동보다 더 강하게 이 나라를 휩쓸고 있다. 외래 사상이나 운동들이 홍수처럼 한국 전통사상의 뿌리를 뽑아 버렸다. 행실의 틀을 잡아준 유교사상이나 마음의 깊이를 더해준 도교사상의 붕괴로 한국사람들의 심성은 지금 풍랑 속의 배처럼 유랑하고 있다. 모두 뿌리뽑힌 나무처럼 판단의 축을 잃고 헤매고 있다. 판단의 중심을 잃은 국민들을 이런저런 사상이나 운동으로 몰아가는 선동가들이 한국에도 많이 나타났다.

아마 한국보다 국민들이 정신적 축이 심하게 흔들린 나라도 드물 것이다. 한국의 현대화와 서구화는 한국인들의 심성과 문화를 모두 다 휩쓸어 갔다. 도시화와 서구화는 고요한 동방의 한국인들이 가진 고유한 심성을 황폐화시켰다. 이웃의 눈치와 공동체의 이익을 법보다 더 중시한 한국인들은 오늘날 아주 방자한 인간들로 바뀌어 버렸다. 최근 후기현대사회로 넘어가면서, 윤리나 가정이나 국가가 해체되어 한국인들은 오직 나밖에 모르는 인간들로 바뀌었다. 심지어 나 자신마저 챙기지 못해서 자신을 방기하는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다. 이런 상태의 국민들에게 국책사업은 정말 강 건너 불 구경에 불과하다.

하다못해 군사정권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먼저 고려했지만, 지금은 그런 큰 공동체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국가나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라는 말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헛소리로 들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 자신과 내 지역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 이러한 ‘국가해체현상’은 불과 한 15년 사이에 일어났다. 이러한 격변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바로 국책사업이다. 특히 환경을 해친다고 찍힌 국책사업은 설 땅이 없어져 버렸다. 깨끗한 국책사업은 서로 유치하려고 싸우고, 공해산업은 어디에도 못 세운다.

나쁜 것은 너희 뒤뜰에 갖다놓으려는 소위 ‘님비(nimby)현상’은 이미 보편화되었다. 공해가 되는 쓰레기들이 갈 곳은 오직 지구 밖이다. 생필품 생산에서 배출된 산업쓰레기들도 갈곳이 없다. 이러한 쓰레기 거부현상은 전력공급에도 적용된다. 생필품인 전기를 사용할 줄만 알지, 그 전력의 생산과 공급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전기가 모자라면 정부를 욕하지만, 전기생산에서 발생되는 산업쓰레기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잔치는 내가 하고, 청소는 너가 하라’는 무책임한 현상이 오늘날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요즘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 얌체족으로 바뀌고 있다. 사익을 먼저 챙기다 보니 국익은 뒷전으로 밀려버리고 만다. ‘즐기는 것은 내가, 고생은 너가’라는 공식을 강요한다. 이렇게 편리한 전기도 즐기기만 해야지, 생산하면서 생기는 쓰레기는 너희가 책임지라는 것이 요즘 인간들의 심보다. 한국의 전력을 40%나 감당하는 원자력발전도 원전수거물의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환경보호가 공산사회의 공산주의나 군정시대의 안보이념보다 더 강하게 원전시설문제를 옭아매고 있다. 맹목적 환경운동가들의 말을 존중하면, 방사능 폐기물은 지구상의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방폐장유치, 대화와 토론만이 문제해결의 첩경

▶지난 9월9일 울진군민회관에서 개최 된 군민 찬반토론회
환경보호라는 유사종교(quasi-religion)에 빠지면, 문명의 이기를 모두 부정하는 망상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바람과 물과 태양을 이용한 에너지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경제성과 현실성이 없다. 자연에너지가 좋은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필자도 자연에너지 활용을 많이 구경한 사람이지만, 자연에너지의 활용은 현실적으로 경제성이 약해서 아직은 미래의 에너지자원이다. 현실은 현실이고 미래는 미래이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것을 우리는 망상증으로 본다. 문명을 거부하는 환경지상주의는 빵이라도 해결하는 개발지상주의보다 더 위험한 사이비 종교가 될 수 있다.

환경보호냐 개발이냐를 두고 많은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갈등하고 있다. 특히 울진처럼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지역에서 ‘환경’과 ‘발전’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원자력 발전을 두고 주민들 간이나 혹은 주민과 관청이 갈등하는 것은 특별한 악덕이 아니라 이 시대의 자연 현상이다. 문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푸느냐가 문제이다. 주민들간에 대결을 부추기는 일방적 선동을 계속할 것이냐 아니면 서로 대화로써 타협할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많이 정보를 수집하고 생각해보면, 환경보호와 문명건설은 충분히 조화될 수 있는 상보적 역할들이 있다.

선동과 폭력이 아니라 토론과 대화만이 결국 원전이나 방폐장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다. 대화는 서로 상충되는 이익이나 생각을 조화시킬 수 있다. 대화의 단절과 거부는 갈등을 화해시키는 데 가장 큰 적이다. 세력들이 갈등할 때에, 더 나쁜 측은 늘 대화를 거부하는 쪽이다. 절대진리에 사로잡힌 인간이나 세력과는 대화와 타협이 일어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서로 모여서 덜 나쁜 악(less evil)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상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서 부족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갖는 최대의 약점이면서 또 최대의 강점이다.

울진 지역에 자손만대로 오염물질을 물려준다는 ‘반핵인사’들과 방폐장을 유치하여 지역의 경제를 살리고 국책사업도 돕자는 ‘찬핵인사’들 사이에 토론회가 지난 9월 9일 군민회관 강당에서 열렸다. 아마 전국에서 최초로 방폐장 유치문제에 대한 공론의 장을 마련했지만, 반핵 측의 불참으로 완전한 토론회가 되지 못했다. 토론을 불허할 만큼의 절대진리를 가진지는 모르지만, 토론을 거부한 행위는 민주적 사회에서 용납되기 어려운 악덕이다. 지역발전에 더 좋은 발상을 갖고 있을수록, 토론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의로운 행동이다. 아무리 옳아도 토론을 거부하는 것보다 갈등해소에 더 독소적인 행동은 없다.

9월 15일 이후 지자체의 방폐장부지 예비신청이 마감되면, 정부도 방폐장 유치를 놓고 ‘공론화기구’를 설치하여 좀더 민주적인 방법으로 지역주민들의 요구와 정부의 국책사업을 절충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대화의 전제조건을 단 환경단체들이 정부안을 수용함으로써 가능한 결과이다. 대화에 무슨 조건을 다는 행위는 하나의 트집에 불과할 수도 있다. 대화의 조건을 많이 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에 훈련이 덜 된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대화를 먼저 하면서 서로의 조건들을 절충해야 한다.

울진에서도 앞으로 방폐장이나 원전을 두고 서로 상충되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이 종종 이번 9일 주민토론회와 같은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공론의 장에서 치열하게 토론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바로 억지논리로 주민들을 속인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찬핵을 하든 반핵을 하든 상대방에게 항상 자신들의 의견을 겸손하게 피력하고 설득하는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 지난 9일 군민회관에서 개최된 주민토론회는 그 공론화의 물꼬를 턴 것이다. 방폐장에 관련 토론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열었다는 점은 주목받을 만하다. 앞으로도 방폐장 같은 지역현안에 대한 주민토론의 장은 더 열려야 할 것이다.

하나 아쉬운 것은 울진군의 관료들이나 사회단체장들이 지역현안에 대한 공론을 피한다는 사실이다. 울진발전포럼과 같은 ‘찬핵단체’의 주장에 의하면, 방폐장은 고향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 수조 원의 국책사업이다. 이에 비해 울진반핵투위같은 ‘반핵단체’는 방폐장을 자손만대로 고향을 오염시키는 유해사업으로 본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의견들은 모두 울진군민들의 애향심에 근거한 것들이다. 다만 서로 방법과 시각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상충된 애향심을 서로 조정하고 타협하는 길은 오직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토론뿐이다. 서로 다른 세력들끼리 갈등할 때에는 공개적 토론으로 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지난 9월 9일 방폐장유치 울진주민 찬반토론회는 공론의 장을 시도했다는 데에 의미가 깊다. 일반적으로 오지인 울진의 민도가 낮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주민들의 활발한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한 울진군 지도층의 무능과 독선만 개선된다면, 울진은 결코 민도가 낮은 지역이 아니다. 이번 토론회를 통해서 국책사업을 남의 사업으로 적대시하는 모래알 같은 한국인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대책 없는 이상주의가 얼마나 국가와 지역과 개인에게 파괴적인지도 이번 주민토론회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울진 원자력발전소에 임시로 저장된 방사능 폐기물을 좀더 완전하게 관리하는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다. 또 오늘날 핵주권이 국제사회에서 이렇게 중요하게 부각되는 시기에, 방폐물은 원자력 에너지만큼 값어치가 있다. 강대국은 핵무기도 멋대로 만드는데, 우리처럼 약소민족은 방폐물에 이렇게 겁을 먹는다. 우리도 용기 있게 방폐물을 재처리하고 핵무기도 만들어야 한다. 토론을 거부한 반핵운동가들이 비겁하게 보이는 것은 거칠고 폭력적인 미국을 너무 깊이 들여다 본 필자의 오만인가? 이 의문은 다음 토론의 주제로 남겨두려고 한다.

/조영환 대표
2004-09-17 오전 9:45:30 입력 / 수정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