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문 (시인,논설위원)

 

1980년대 만화를 좀 봤다는 사람이 그 유명한 『공포의 외인구단』을 모른다면 간첩(?)일 것이다.

그 대표적 주인공, 까치와 엄지가 만화책도, 대본소도, 만화방도, 웹툰도 아닌 고즈넉한 시골 골목에 나타났다. 한국화도, 서양화도 아닌 만화 장면의 주인공들이 시골 벽화에 등장한 것이다. 그들의 등장으로 시골 골목은 이야기로 풍성해졌다. 메마르고 강팔랐던 벽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났다.

이제 그곳에 가면 추억과 동심과 희망이 있다. 『외인구단』 말고도 일본 자위대를 개박살내며, 통쾌하게 까부수는 『남벌』의 장면도 있고, 『삼국지』 주인공들과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질투, 오기와 강인함, 집념, 슬픔과 눈물, 용맹과 투쟁, 통쾌한 승리, 따뜻한 정겨움, 동심어린 꿈과 희망이 가득 살아나고, 가난했던 시절, 농촌의 모습들도 파노라마처럼 그려져 있다. 도대체 시골 골목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겨울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곳, 따스한 정감이 흐르는 거리로 변신되었다. 누군가는 찬찬히 보면서 만화로 추억에 잠기고, 나도 한번 그림 속 주인공이 되고픈 곳으로 바뀌었다니! 바로 이현세 만화 벽화거리가 조성된 것이다. 농촌지역에서는 전국 최초라고 한다. 만화전용 도서관도 아담하게 개관했다. 울진에 연고를 가진 만화가 이현세 작품으로 한적한 골목을 멋진 문화예술의 거리로 재탄생케 노력한 모든 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필자에게도 만화에 대한 추억은 새롭다. 지금은 ‘웹툰’으로까지 발전한 만화가 밥보다 흔하다지만 만화책이 귀했던 60년대, 박기당 화백이 그렸던 역사 만화는 지금도 내 기억에 새롭게 남아 있다. 그 중 『만리종』은 만화라기보다 장면 하나하나가 어린 필자에게는 처음 보는 한 폭의 멋진 그림, 동양화 그 자체로 이제는 만화의 고전이 되었다.

1980년대 이현세의 작품 중 『공포의 외인구단』도 마찬가지다. 야구계의 명투수였던 마동탁에 맞서 지옥훈련을 마친 까치와 일단의 야구 선수들, 끝내는 팀을 승리로 이끈다는 이야기를 장편으로 그린 작품으로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과 질투, 지옥훈련이라는 역경을 이겨내는 불굴의 정신이 담긴 만화다.

한국 만화계의 대표적 상징물(캐릭터) 까치와 엄지는 이현세의 분신, 아니 이현세 자신이었다. 이 작품은 불굴의 의지를 가진 주인공 까치가 시원 통쾌한 만루 홈런을 만화에서뿐만 아니라 작가 이현세에게도 안겨준 출세작이나 다름없다. 요즘말로 대박이 터진 이 작품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만화계의 지존이 되었고, 국민만화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한편 이현세 작가는 우리나라 만화사를 새롭게 썼다. 당시만 해도 만화가 아이들의 심심풀이용 읽을거리로 치부되고, 오죽하면 만화가 아이들의 정서를 해친다고 불량만화 추방운동이 벌어진 것은 물론 만화방이 유해업소로 낙인찍히고 심지어 만화가들조차 만화윤리강령 운운하면서 자정대회까지 벌이곤 했다. 한국만화사로 보면 ‘현대판 분서갱유’의 시대였다. 하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은 어른들의 만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고, 이로써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 만화시대가 열렸다.

이 작품으로 만화시장은 ‘프로덕션화’하여, 만화방 같은 좁은 유통시장을 벗어나 전문제작시대가 열렸다. 만화가 텔레비전 매체를 통한 드라마, 광고는 물론 더 나아가 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화된 『외인구단』을 신호탄으로 본격 장편 서사구조의 만화가 대세를 이루어 갔다. 하루빨리 후속편이 나오기를 바라는 장편서사구조를 가진 새로운 만화들은 명랑만화나 단편 위주였던 기존 만화보다 사람들의 깊은 공감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당시 청소년, 어른 할 것 없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이현세의 작품은 『외인구단』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었다. 영화 제목이 원작 제목보다 짧아진 까닭은 검열당국에서 『공포』라는 단어가 국민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이었단다. 군사독재로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으며 ‘공포’를 조장하던 시대에 도둑이 제발을 저린 것일까? 하여튼 지금 보면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현세의 작품이 모두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다. 작품에 나타나는 남성우월주의, 비과학적 사고, 고증의 오류, 노골적인 성적 표현 등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작품 『천국의 신화』의 경우, 예술과 외설 논란 속에 음란물이라는 혐의를 얻어 법정까지 갔지만 결국 승소했다. 예술작품은 단편 부분 또는 몇 장면이 아닌 작품의 전체 맥락으로 외설 여부를 평가해야 한다는 판례를 남겼다.

만화거리가 준공되어 가로줄을 끊던 날, 직접 그곳을 찾은 국민만화가 이현세를 만나볼 수 있었다. 수수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을 한 이현세 작가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면사무소 옆 거리는 오랜만에 북적댔다. 하얀 담 벽의 만화 주인공과 주요 장면과 함께, 그의 만화인생 역정과 철학이 담긴 경구가 겨울 햇살에 빛났다.

이를테면 “잘 노는 사람이 문화를 만든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호기심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벽을 눕히면 길이 된다” 등이다. 이현세 만화벽화 거리가 있는 곳!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에 한번 가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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