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경기도 광명시에는 20대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객지친구가 산다.

출판사에서 같이 편집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지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말은 작가지만 그다지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던지 젊은 시절부터 신춘문예에 수도 없이 도전해 봤지만 실패하고, 40대 중반에 뒤늦게 지방 계간지에 소설로 등단해 활동을 하는 친구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40대 초반에 IMF로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된 처지라 동병상련으로 서로에게 위로받고 위안되다보니 허물없이 부탁하고 들어준 지 오래다.

그 친구가 작년 이맘때 내게 무리한 부탁을 해온 적이 있다. 글재주보다는 말솜씨가 좋았던지 작가로는 크게 유명세를 얻지 못했지만, 그가 맡은 문화센터 글쓰기강좌는 꽤 호응이 높은 것 같다. 주로 서울 위성도시들을 돌며 각종 문화센터나 시, 구청 문화원에서 주부들과 학생들의 글쓰기를 지도하는데 방학 때는 시간에 쫓길 정도다.

또 그에게 작문을 배운 사람들이 동아리를 만들어 가끔 과외 지도를 요청하기도 하는데, 작년 겨울방학 때는 그 친구가 너무 바빠 내게 동아리 하나를 대신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어른들을 지도해 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한사코 부탁하는 바람에 그러마고 덜컥 수락해버렸다. 작가를 꿈꾸는 어른들을 가르치는 것은 무리지만 남이 쓴 글을 읽고 느낌은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딱 거기까지가 내 역할이라고 한정한 다음 동아리 하나를 맡아 매주 수요일 저녁 수업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수업은 험난했다. 내가 맡은 팀은 나이가 대부분 50대인 여성 다섯 명이었는데, 학창시절 문학소녀로 교내 백일장을 휩쓸던 전력은 가슴에 묻어둔 채, 과거의 식구들과 현재의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가 뒤늦게 꿈을 꺼내 든 문학주부(?)들이다. 주름진 눈에도 소녀적 감수성이 날 선 채 깜빡이는 것을 볼 때는 확실히 사람에게서 꿈이란 생기를 돋우는 윤활유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고이 간직돼 온 그녀들의 감수성은 신체적 세월과 어긋난 채 드러나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50대 주부가 열다섯 문학소녀가 쓴 오래 묵은 일기장을 펼쳐놓고 이어쓰기를 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운영하던 식당을 아들 부부에게 물려주고 못다 한 꿈을 위해 문화센터에서 글쓰기를 배운다는 李여사도 그중에 한분이었다. 그녀도 학창시절에는 글쓰기로 상장도 몇 번 받았다고 했다. 글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60년대 교장선생님들이 좋아했을 예쁜 글이었다.

예를 들면 부모님과 가족사랑, 존경하는 선생님, 세상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우리들의 우정, 지상낙원이었던 내 고향 등을 60년대 소녀적 감성으로 쓴 글이다. 요즘 아이들 말로 ‘추억 돋는’ 내용이지만, 단순한 형용사로 수식한 나열이 전부였고 문학적 기교는 거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문장이 너무 짧아서 단순하니, 수식어를 활용하여 의도적으로 문장을 길게 써보라”고 주문했다. 내 말은 꾸밈말을 사용하다 보면 기법이 생길 것이라는 뜻이었는데, 그녀는 나열을 늘려 문장을 아주 길게 쓰기 시작했다.

“우리 집 텃밭에는 오이, 호박, 가지, 고구마, 옥수수, 감자, 고추......” “뒷산에는 도토리나무, 밤나무, 아카시아나무, 싸리나무, 소나무, 진달래, 상수리나무......” 나는 그렇게 사물 이름을 길게 늘어놓으면 지루한 느낌이 드니까 대표적인 것을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 또는 계절이 앞선 것에서 늦은 것 순으로 짧게 적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설날에는 마을에서 소도 잡고 돼지도 잡고 닭도 잡고......” 저어, 대표적인 것만. “선생님, 그럼 소만 잡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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