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격세지감이라는 어휘가 미흡해서 그보다 강렬한 용어를 골라봤지만, 오늘의 현실을 표현할 마땅한 말을 결국 찾지 못하고 대략 격세지감의 열 배쯤 되는 느낌이라 적는다.

당장 내 손 안에 놓인 인터넷을 통해 벌어지는 이 엄청난 판 뒤집힘에 하도 놀라 넋을 놓고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지낸지 오래다.
여기서 말하는 뒤집힌 판은 몇 년 간의 정치판이다.

이럴 때 대다수 국민들은 나처럼 얼이 빠져 추천 비추천도 판단이 서지 않아 닫기를 누르고 말지만, 이 뒤집힘 속에서도 울고 웃는 자들은 날이 설대로 선 비수를 서로에게 휘두른다. 내가 여기서 ‘뒤집힘’이라 적는 까닭은 역전이라고 하면 웃는 자들이 추천할 것이고, 깽판이라고 하면 우는 자들이 추천을 하기 때문이다. 누려온 것도 없어 울 것도 없지만 우습지도 않다.

1980년대, 운동권에서 은밀하게 읽히던 책들 중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초상’ 이라는 단편소설집이 있었다. 운동권에서 발간한 서적이니만큼 우파 정치인을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도 많았다. 그 중에 ‘너 왜 안 웃었어’ 라는 단편이 생각난다. 읽은 지 워낙 오래여서 내용이 가물거리지만, 기억이 나는 대로 줄거리를 적자면 이렇다.

산골 비탈밭에서 밭일을 하던 농부가 어느 날 느닷없이 순경들에게 끌려간다. 농부는 읍내 경찰서로 호송됐고 서장실 책상 앞에 무릎이 꿇린 채 떨고 있었다. 몇 차례 구타가 있고 나서 경찰서장이 뜬금없이 묻는다. “너 왜 안 웃었어?” 무슨 말인지 몰라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또 구둣발이 날아왔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였던 홍보 책자를 농부의 눈앞에 들이민다. 책자는 그 지방 지역구 국회의원의 홍보물이었다.

표지의 컬러사진에는 유세 중인 국회의원이 연단에서 손을 치켜들어 연설을 하고 있고, 앞에는 군중들이 모두 웃고 있었다. 사진을 보고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몰라 쩔쩔매자 서장이 구경꾼들 중에 유일하게 웃지 않는 농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너 왜 안 웃었냐고 이 새끼야”

사연은 이랬다. 장날에 농부가 시장을 갔다가 선거 유세 중인 국회의원의 연설대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국회의원은 군중들 앞에서 쌍스러움이 질펀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장마당 건너 민둥산을 가리키며 “저기 미친년 궁둥짝같이 벌거벗은 저 산, 저 산에 나무를 심겠습니다!” 구경꾼들은 웃었고 농부는 안 웃었다.

한 신문에서 비리 문제로 지지율이 떨어진 그 국회의원의 기사를 다루면서 홍보 책자의 그 사진을 실었는데, 불만스레 기사를 읽던 의원님의 눈에 ‘웃지 않는 유권자 새끼’ 하나가 보였던 것이다. 의원님은 지역구 경찰서장한테 전화를 했고 마침내 그 사단이 났던 것이다.

까마득히 잊혔던 그 소설이 절실히 생각나는 시절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어디서든 표정관리를 잘하지 않으면 한방에 훅 가는 세상이다. 이번에는 그 시절 풍자소설에 등장하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국회의원님이나 경찰서장님이 무서운 시대가 아니다. 스마트 폰으로 인터넷을 지배한 군중들이 진짜로 무서운 시대가 됐다.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동계올림픽에서도 방송과 인터뷰를 하던 선수의 웃음 때문에 논란이 크게 있었다. 그 선수는 평소에도 웃을 때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군중들은 그 선수가 다른 선수를 비웃었다며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20대에 불과한 어린 선수에게 가한 군중들의 성토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 선수는 남은 경기가 있음에도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다행히 마음을 추스르고 경기에서 실력을 발휘하여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시상대에서 메달을 목에 걸고도 웃지 못했다. 훗날 그 장면을 보면서 누군가 “너 왜 안 웃었어?”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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