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이 만난사람 (2) - 법무법인 진우 주재현 변호사


 

장남으로서, 가난과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

아버지는 아프고, 고학으로 마흔넘어 사시 패스

 

▶우리 동네 변호사 주재현
한 베테랑 변호사가 딸을 유능하고 젊은 변호사에게 시집보냈다.

장인은 사위에게 결혼선물로 자신이 맡고 있던 중요한 사건 하나를 넘겨주었다.

며칠 후 사위는 득의양양하게 장인 앞에 나타났다. “장인어른, 제가 그 사건에서 완벽하게 승소했습니다.”

그러자 장인이 말했다. “앞으로도 20년은 거뜬히 먹고 살 수 있는 결혼선물을 벌써 끝내버리면 어떡하나” 30년 전 학생들이 영어공부를 위해 보던 잡지 <월간영어> 유머 코너의 한도막이다.

그 책을 읽던 당시 우리는 이게 왜 유머인지 몰랐다. 우리에게 변호사님은 성역이자 우러러 보는 대상이었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그런 정서는 여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늘 내가 소개할 이분을 만나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30년 전, 학생들에게 <월간영어>를 배달하며 학비를 벌던 고학생 출신 주재현 변호사다.


▶우리 동네 변호사님이 첫손에 꼽는 에피소드
변호사님들께 이런 질문을 하면 대부분 아주 어려운 국가적(?) 재판에서 자신의 맹활약 덕분에 승소한 사건을 들려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분은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요즘은요,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어서 이혼하는 것보다 시부모나 장모 때문에 이혼하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아들 부부를 이혼시켜달라며 찾아온 어머니가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당장이라도 이혼을 해야 될 처지였다. 오퍼상을 하는 아들 내외가 장모님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장모는 빚을 내어 다가구주택에 투자를 하고 있었고 딸네 전세금까지 빼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처가살이를 하는 처지였다.

함께 살게 된 후로 장모의 사위 구박은 날로 더해갔다. 3백만 원 남짓한 수입에 대해 무능력을 꼬집으며 사위의 수입관리까지 나섰고, 사위는 한 달 용돈 20만원으로 버티면서도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 와중에 투자한 집값이 폭락하면서 장모는 큰 빚을 지게 되었는데, 애처가인 사위는 그 빚마저 일부를 떠안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돈 간에도 폭언이 오갔고 결국 각각 변호사를 선임하여 합의 이혼을 하게 되었다. 쌍방이 이미 충분히 합의하고 서류까지 완성한터라 재판정에서 판사의 선고만 남은 상황인데 남자 측에서 20분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을 하고는 부인을 데리고 나갔다.

한참 후에 부부는 폭풍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고 나타나서는 제발 우리 같이 살게 해달라고 이혼을 번복하더란다. 부부의 절절한 울음에 양측 변호인은 물론 젊은 여성판사님까지 눈물을 글썽이는 바람에 재판이 진행되지 못할 정도였다. “연륜이 조금이나마 더 많은 제가 나서야 될 것 같아서 이혼소송 무효에 대한 조정서 작성을 도와드렸죠.” 조정서 내용은 이랬다.

“우리 부부는, 부모들로부터 우리 가정을 지킨다. 우리 부부는, 부모로부터 반드시 떨어져서 살 것이며, 우리 가정의 보호를 법에 요청한다.” 부부는 환하게 웃었고 재판정에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주변호사님다운 일화다. 재경 울진군민들이 좋은 일을 할 때마다, 소탈한 웃음으로 나타나서 함께 정을 베푸는 주재현 변호사를 나는 울진 동네 변호사라 부른다.


▶가난 그리고 장애인
“제 고향은 울진군 북면 하당리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되었지만 예전에 하당리는 울진에서 손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외진 산골이었다. 그곳에서 18살에 결혼한 부모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에는 부모와 조부모님 그리고 증조부모까지 계신 대식구였다. 태어나서 6개월이 지날 즈음 가난한 젊은 어머니는 간난쟁이를 등에 업고 한겨울에 겨우 모포 한 장을 덮은 채 화성리 꽃방 친척집 이바지에 갔다. 독감에 걸린 아기는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관절에 결핵균이 침투했고 그로인해 한쪽다리는 평생 불구가 되고 만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관절장애가 시작되었다. 게다가 땔감으로 솔방울을 따다가 산에서 굴러 아픈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학교에 가지 않고 1년을 증조모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다리 관절에서 고름이 흘렀다. 헝겊으로 둘둘 감아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까지는 부모님이나 이웃사람들이 업어서 데려다주거나 혼자 깨금발로 뛰어서 다녔다. 집에서는 증조모가 아픈 부위를 씻고 고름을 짜내어 새 헝겊으로 싸매어주었지만 등하교길에도 헝겊에 흘러내리는 고름을 닦기 위해 그 어린 나이에 혼자 냇가로 내려가 수시로 응급처치를 하곤 했다. 곪은 부위가 썩어서 여름에는 심한 냄새와 상상조차 힘든 고통이 따랐다.

4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고름이 멈추었다. 하지만 이미 다리가 안으로 완전히 굽어 붙어버린 상태였다. 고통은 점점 더해져 결국 1차 수술을 하게 된다. 아들 보다 겨우 20살이 더 많은 젊은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겪는 고통에 가슴은 미어졌지만, 가난한 집안에 부모와 조부모님 그리고 줄줄이 달린 동생들을 두고 어른들에게 몇 마지기 되지도 않은 농토를 팔아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중소까지 키워 팔아 아들 수술에 나섰다. 분천에서 열차를 타고 철암에서 탄광에 다니는 외삼촌 집에서 하루를 묵고 중앙선을 타고 청량리에 도착, 세브란스 병원에서 비로소 수술을 받아 다리를 고정시켰다. 그때가 4학년, 완전한 치료는 이미 늦은 나이였다. 젊은 아버지는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슬픔이 일상이었던 청소년시절
마을 전체에서는 2명만 중학교에 진학했다. 주변에서는 장애인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서 뭐 할 거냐며 시계 고치는 기술이나 배우게 하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중학교에 보냈다. 곤궁한 형편이라 하숙을 얻지 못하고 자취를 했다.

그마저 방값이 비싼 학교 근처는 엄두도 못 내고 학교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아는 집이 있어 방을 얻었다. 불편한 몸으로 공부도 힘들었고 워낙 산골에서 온 처지라 울진읍내 학생들에게 주눅이 들어있는데 의외로 첫 시험에서 2등을 차지했다. 아주 작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 즈음 하당리에도 토요일 오후에 한번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한번 버스가 운행되었는데 하당에서 죽변을 거처 울진으로 가는 버스였다. 읍내에서 자취를 하던 학생들도 토요일이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월요일 아침 버스로 등교했다. 버스를 놓치면 울진까지 12킬로미터를 걸어서 가야만 했다.

한번은 월요일 등교길에 죽변에 이르기 전 범상골에서 버스가 고장이 났다. “그 불편한 다리로 범상골에서 죽변으로, 다시 울진까지 걸어서 학교에 도착하니 4교시 수업 중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생했다고 다독였다. 아버지의 결핵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아픈 다리로 자꾸 걷다보니 한쪽 다리가 들릴 정도로 점점 활처럼 휘어졌으나 용돈 한 푼 받아본 적 없는 형편으로 자전거를 사달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다행히 중3때 문교부에서 실시한 표어 공모전에 가작으로 당선되어 당시 돈으로 1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세금 3천원을 제하고 7천원으로 자전거를 샀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배워야겠다는 열정은 접을 수 없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사춘기 열병이 지나고 있었으나 3명의 동생들과 결핵으로 오늘내일하는 아버지 앞에서 슬픈 내색조차 힘들었다. 친구들에게 <월간영어>를 주문 받아 몇 푼의 수수료를 모아 학비를 보탰다. 수학여행은 엄두도 못 내고 집에 갔는데 담임선생님이 수학여행비를 대신 내주시고 격려해 주셨다. 고마운 분들에 대한 보답을 위해서라도 공부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2차 수술로 대학 중퇴 그리고 법대진학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더 하려고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는 삼촌 숙소에 얹혀살게 되었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던 친구와 함께였다. 그 친구에게도 다리가 장애인 동생이 있어 누구보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막역한 관계로 지낸다. 나이 겨우 두 살 더 많은 삼촌은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오래 머물러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었다.

삼촌이 공장에서 손가락 3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삼촌 역시 어린 나이라 감당키 힘든 시련을 술로 달랠 수밖에 없었고, 제가 기댈 형편이 아니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지요.” 함께 상경했던 친구는 결혼한 누나와 매형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학업을 계속하였고 경북대 법대에 합격했다.

그리고 일찌감치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지금은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안 형편이나 신체적인 고통으로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었어요.” 교사가 될 생각으로 그 와중에도 경북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미 심각하게 휘어진 다리는 땅을 밟으면 몸이 기울어 걸음을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동서울병원에서 진단한 결과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권유했다. 고통을 멈출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수술대에 오르고 싶었지만 80만원이라는 거금의 수술비가 없었다. 치료비가 저렴하다는 소문을 듣고 전라도 여수애양재활병원으로 갔다. 선교사가 설립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해오던 병원이었다. 정밀검사에서 양쪽의 다리길이가 6센티나 차이가 났다.

결국 두 다리 모두 절단 후 재 접합 수술을 받았다. 그러자니 3개월 동안 입원을 할 수밖에 없었고 퇴원을 하고보니 가을학기 복학신청을 놓쳐버린 것이다. 3개월 공부한 뒤 전액 장학금을 기대하고 동의대학교에 시험을 봤으나 전체 차석으로 그마저 힘들게 됐다. 그때 울산공고를 졸업한 동생과 함께 1982년 한 해 동안 이웃한 큰외가댁 골방에서 공부에 몰두해 83학번으로 부산대 법대에 입학했다.


▶마흔을 넘고 드디어 사법고시 합격
법대합격이 고시패스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때는 포기를 하고 중견기업에 취업도 해보았으나 내적 갈등에 그마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결핵은 신약이 더 이상 듣지 않을 정도였고 한쪽 폐의 절반으로 겨우 연명해가고 있었다.

가난과 싸우며 1차 합격이 3번 지나는 동안에도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했고, 빚더미 위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고독한 레이스는 계속되었다. 공부만 계속 할 형편도 못되었다. 평소에는 학비를 벌다가 시험 6개월을 앞두고서야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 세월이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기고 2004년 드디어 결승선이 발아래 지나고 있었다. “고향 울진에 플레카드가 26장이나 걸렸어요. 하하” 고시패스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개업을 하고 얼마간 법무법인을 유지하자면 또다시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직 얼마간의 월세를 부담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서울에 사는 울진군민들이 좋은 일을 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기부를 한다. “고향 분들 덕분에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요. 울진에 도움이 된다면 힘이 돼 드려야지요.” 역시 주변호사님다운 말씀이다.

사람들은 병의 위중에 따라 대학병원을 찾기도 하고 동네 병원에서 먼저 진료를 받기도 한다. “처음 다리가 아팠을 때 바로 울진 동네 병원에 가서 조처를 했더라면 내가 그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요. 법률 진단도 마찬가지예요”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문자가 왔다. “아까는 다 말씀 못 드렸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당신의 질병에, 장애인 장남에, 여기저기 빚을 내는 것조차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젊은 시절 가난한 아버지를 원망했던 게 많이 후회가 돼요.” 아, 멋진 분이시다.
 

▶변호사 주재현 약력
◈사무실 :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73-10 로이어즈타워 507
          법무법인 진우 변호사(교대역 8번출구)
          02) 585-5200, 팩스 02) 585-5330
◈주요약력
  1. 경북 울진 출생, 울진중학교, 울진종합고등학교 졸업 2. 부산대학교졸업, 연수원제36기(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연수) 3. 2007. 2. 서울지방변호사회 개업(서초동) 4.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상근조정위원 5. 전 서울 서초소방서 조정위원 겸 법률고문 6. 전 대한자원재활용협회 법률고문 7. 전 대한장애인문인협회 법률고 8. 현 사단법인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감사 겸 집행위원 9. 현 대한변협이사, 전 서울변협 공익활동위원회 위원장 10. 전 재경울진중고등학교 총동문회장, 전 재경울진북면민회장 11. 현재 연세대학교 법무대학원 재학중(공정거래법 전공) 12. 현 한국방송통신산업협동조합 법률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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