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 저런 이야기(70)

 

우리는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고 삶의 의미를 배우기도 한다. 꽃은 우리에게 무수한 의미를 던져준다. 세상에 어떤 꽃이 아름답지 않으랴마는, 그중에 나는 매운 계절에 피는 매화를 사랑한다.

매화는 왜 험난한 길을 택하는가. 뭇 꽃들은 겨울을 숨죽인 채 보내고 따뜻한 봄날에 만발하건만, 어찌하여 매화는 혹한의 추위를 무릅쓰고 피는 것인가. 그것은 남다른 의지가 있기 때문 아닐까.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매화를 사모하여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렸으니, 그들에게 매화는 일종의 은유이거나 한낱 꽃이 아니라 벗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꽃과 자신이 온전히 하나 되는 위대한 경지에 이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인지 옛 사람들이 자신의 집 뜰에 매화를 심고자 했다. 조선의 유학자 남명 조식은 매화를 사랑하여 산천재 뜰에 손수 심고 가꾸었으니, 그 사랑의 각별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언 남명매의 수령이 450여년, 그런데 꽃향이 올해 유달리 좋았다는 소식이다.

곧은 절개를 자랑하는 선비의 향기인가.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선비라고 자처하는 자, 실은 다분히 권위적이고 쓸모없는 일에 논쟁적어서 진정한 선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대표적 선비가 남명이다. 그는 조그만 칼을 지니고 다녔는데, “안에서 밟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귀를 칼에 새기고 스스로 경계하였다.

남명은 나라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를 거부하고 손수 심은 매화를 가꾸면서 평생 실천 유학을 강조한 처사로 남았으니, 이는 눈보라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의연한 매화의 정신이었을 것이다. 일생을 추위 속에서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의 고운 자태, 그 은은한 향으로 세속의 번뇌와 시름을 달랬을 것이니, 벗으로 치자면 세상에 그만한 벗이 어디 또 있었겠는가.

매서운 추위를 뚫고 얼굴을 내민 매화에서 독한 오기나 결기 보다는 곧은 지조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유혹에 쉬이 흔들리고 마는 내 얄팍한 세상살이에 대한 꾸짖음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이 그 뿌리로 돌아가 삭막한 시대에 제 품은 향으로 심신을 그윽케 하고 그저 무심하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고아한 흥취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매화의 미덕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겉모습을 보는 것일 뿐 진정한 의미는 아니다.

고결한 사람들이 자신의 집 마당에 매화나무를 심어 그 꽃을 보고자 했던 것은 결코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어떤 불의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을 스스로 다지기 위함이었을 것이니, 그 꽃은 설한풍의 물음에 대한 매화의 말없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꽃은 그저 가까이 두고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참된 길을 걷고자 했던 올곧은 자들의 표본으로 마음에 심어져 있는 꽃이었다.

매화를 바라본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으나, 세월이 흘러도 피고 지는 꽃이 변하는 것이 없는데 우리들 마음은 지조가 없는 것인가, 다만 그 꽃을 담아야 하는 마음이 갈수록 가난해져 부끄러울 뿐이다.

나이 들수록 몸무게만큼 불어나는 생의 불만족은 도대체 무엇으로 다스릴 것인가. 그것이 소유의 집착이요 탐욕이라 한들 또 어찌할 것인가. 꽃은 때가 되면 피기도 하지만 정점을 지나 때가 되면 미련없이 지기도 하는데,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집착과 탐욕은 어쩐지 그 끝을 알 수 없어 차마 줄일 수도 버릴 수도 없다.

스스로 지은 잘못이든 외부로부터의 영향이든 끊임없이 일어나는 집착이 소유와 탐욕의 끈을 놓치지도 버리지도 못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던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의 이익과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덥석 손을 잡고 마는, 오욕에 물드는 것은 얄팍하고 타산적인 마음이 꽃을 보되 올바른 마음으로 보지 못함이다. 고요히 핀 저 꽃은 제 핀 이유를 말없이 우리에게 묻고 있으나 입은 있으되 대답을 하지 못한다.

매서운 추위에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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