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용(前서울경찰청장)

 

재경(在京) 울진출향공무원 모임인 <진공회>에서 고향 탐방 행사로, 월송정과 대풍헌(待風軒) 그리고 봉평신라비 전시관을 방문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갔었던 월송정 일대 금강송 군락은 그간 극성을 부려온 병충해와 주변 개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해풍을 껴안은 강인함 때문인지 더욱 늠름하고 중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나도 이곳 소나무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이어서 도착한 기성면 구산리 ‘대풍헌’은 경상북도 기념물로, 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수토사(搜討使)가 배를 타기 전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목조건물이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억지 주장이 도를 넘은 현시점에서 대풍헌은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국가적 기념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조선왕조에서 이곳에 대풍헌을 건립했다는 것은 이 일대가 울릉도나 독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며, 항해가 비교적 편리하고 안전한 출발지로 판단했음을 역사적으로 입증한다. 따라서 포항이나 묵호, 강릉에 비해 우월한 조건임을 강조하여 울릉도와 독도 관광객 유치경쟁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홍보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풍헌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출입로를 좀 더 확장하고, 대풍헌 마루에서 독도 조형물과 더불어 동해바다를 직접 조망할 수 있도록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시야를 확보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독도수호 증거자료로서도 가치 있는 대풍헌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소망을 안고 봉평신라비 전시관으로 이동했다.

봉평신라 전시관에 도착하여 입구에 서있는 공덕비를 보면서 공무원이었던 나는 참다운 국민의 공복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전체적인 규모나 짜임새 그리고 분위기, 전시목적 등이 매우 훌륭하여 사람들에게 꼭 한번이라도 방문하기를 권하고 싶다.

특히 학생들의 수학여행 장소로 적극 추천한다. 야외전시관에는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하여 진흥왕 순수비 등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 비석들이 실제와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재현되어 있는데, 그 규모나 정교함이 완벽하여 만든 사람들의 정성과 건립관계자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싶을 정도였다.

전시된 비석 중에서 유일하게 실물인 봉평신라비는 국보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대단한 것이지만, 비석의 내용을 들으면서 해설하시는 분들이 당시 울진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입장도 관람객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문 내용은 신라가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울진지역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편입된 뒤 원주민들의 항쟁사태가 일어났고, 신라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한 후 관련자를 징벌하고 다시는 저항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라의 영토, 율령체제, 왕권, 관료제도 등을 알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역사적 사료로 매우 가치가 높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한편으로 울진사람의 입장에서, 우리지역이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토벌을 당했다는 것과 다수의 주민들이 곤장 50~100대라는 중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경계비를 세워 감시당한 곳으로 인식 된 것 같아 그다지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관람객들에게 그러한 오해의 소지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점에서 봉평신라비를 설명하시는 분들이 울진지역 원주민들의 입장도 덧붙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울진지역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강제 복속되었지만, 주민들은 고구려에 대한 충절과 신의와 의리를 지키고자 했으며, 정복지에 대한 푸대접과 무시에 대항하는 항거 그리고 도전 정신이 있었던 당당한 지역이었음을 부언하여 설명한다면 전시관 설립 목적이 더욱 돋보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1963년 1월 1일 울진군은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관할구역이 이전되었는바, 당시 집권세력인 대구경북(TK) 사람들은 “울진이 비탈(강원도를 지칭)이지 무슨 TK냐”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대구경북(TK) 시대에서는 非TK 지역 취급을 당해오다가, 정권이 바뀌면 이번에는 대구경북(TK) 지역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지역개발이 낙후되고 진급인사 등 각종 혜택에서 소외되는 말 못할 아픔을 겪어왔다. 대게의 집하장 때문이라 하지만 울진에서 생산되는 게가 ‘영덕게’로, 울진에서 생산된 소나무가 ‘춘양목’으로 불렸던 울진의 아픔이 봉평신라비에도 스며있는 듯해서 가슴이 아렸다.

신라시대와 같은 항쟁은 없었지만, ‘울진대게’, ‘금강송’으로 자랑스러운 이름을 되찾고, 낙후된 지역을 이만큼이라도 발전시켜냈던 그 힘은 울진군민에게 내재되어 있는 강인한 도전정신과 쉽게 꺾이지 않은 강건함 덕분이 아니겠는가. 이번 울진 여행을 마치고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 파도처럼 밀려옴을 느끼며 서울로 가는 자동차에 올랐다. 시선은 여전히 고향 바다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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