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이 만난 사람 (3) 박광무 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원장



9천여 권의 장서에 파묻힌 학구파

미래 인문학적 전망 가르치며, 연구 중

 

고대 철학자 안드로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을 정리하여 책으로 간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반 사람들이 읽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 즉 감각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자연학(Physics)을 책 앞쪽에 배치하고, 어렵고 추상적인 내용을 뒷부분에(Meta) 엮어 출간했다.

그 바람에 윤리학, 논리학, 존재론, 인식론 등의 ‘형이상학’은 Metaphysica(자연학 뒤쪽)로 불리게 되었다.

박광무 원장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그분이 정말 울진신문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자신의 학문적 분야를 먼저 다루어야겠지만, 너무 어려워서 앞부분에 적었다가는 독자들이 신문은 덮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이분은 참으로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박광무 원장은 만18세에 9급 공무원을 시작으로 7급 그리고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한국 문화관광연구원장(차관급)까지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력만 보아도 공부를 예사롭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공부 경력이 공직에서 은퇴한 이후 제2의 인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높은 공직에서 은퇴를 하면 남들은 인생의 여유를 즐길 때라 생각하지만, 박광무 원장은 교육자로서 아직도 현장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현재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 초빙교수,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외래교수, 호서대 경영대학의 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공무원 인재개발원 역량학습지도교수로서 공무원 합격자들과 진급자를 대상으로 역량강화를 위한 교육을 담당한다. 이 밖에도 한국 문화 분야 전문가들의 학술연대 단체인 Korea Maestro Network 한마당(韓磨堂) 대표를 맡고 있다.

울진읍 읍내2구에서 7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추억에는 현내, 공석, 염전, 말루, 금산 등 울진읍이 손바닥처럼 펼쳐진다. 여의치 않은 형편이라 위로 형님 둘과 누님 둘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박원장은 울진중학교 입학시험에서 2등, 진학할 명분이 확실해졌다. 집안에서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하였고 중학생이 되면서 아이스케키 팔기, 가축 키우기 등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보탰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마침 학교도서관 도서계원 자리가 비었는데, 도서관 책임자인 수학선생님의 권유로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도서계원은 등록금 면제혜택이 있었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도시로 유학을 갈 형편이 아니어서 울진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래서 울진고등학교 수석입학, 수석졸업이라는 명예로운 이력이 생겼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칠 때까지 도서계원을 맡을 수 있어서 등록금 걱정을 덜었고, 모범적인 생활과 공부는 습관이 되어갔다.

특히 틈틈이 생긴 시간은 공부를 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시간에는 영어단어 10개씩 외웠다. 목표는 육군사관학교였다. 강인한 체력을 만들기 위해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했다. 그래서인지 박원장을 처음 뵈었을 때, 군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듯한 품새에 웃음이 인자한 사단장 느낌이 든다.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예의 그 인자한 미소로 아마 그랬을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에 지금이라도 ‘헌법소원’을 하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1차 필기시험은 합격했지만, 신체검사에서 ‘색약’으로 탈락되는 바람에 육군사관학교를 포기해야만 했다. 초중고를 졸업하는 동안에 한 번도 검사에서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색약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육사 신체검사에서 숫자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바로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단다. 살면서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느껴본 적이 전혀 없었을 정도로 미세한 색약이 왜 군인으로서 부적격인지 헌법으로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박원장은 자주포부대 측지병으로 근무하면서 수도권을 방어하는 1군단 전체 포병대대가 참여하는 군단포술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여 1달간 포상휴가를 획득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낙방은 현실이었고 대학을 가려면 재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재수 중에 공무원 시험에 한번 도전을 해보았다. 당시 5급을류(현재9급)에 당당히 합격했다. 시험자격 만18세를 막 넘었을 때였다. 이듬해 김천우체국으로 발령이 났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1973년 서울대부설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했다.

매일 새벽 5시45분부터 6시30분까지 과목당 15분씩 압축강의가 있었고, 빠짐없이 방송을 들으며 필기를 했다. 속기 수준의 받아쓰기는 그때 생긴 능력이다. 당시 방송통신대학교는 2년제였는데, 4년제 대학교로 편입을 하기 위해서는 편입학 검정고시에 통과해야만 했다.

딱히 진학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만약을 위해 검정고시에 응했는데 전국 수석으로 합격했다. 공부에 자신이 넘칠 만도했다. 과감히 경북대학교 법과대 학장님께 편지를 썼다. 경대 법대 야간에 편입할 수 있는지. 어처구니없는 그 편지에 학장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귀하의 학업능력을 높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희 법학과에는 야간이 없고, 창설이후 편입생을 모집한 사례가 없어 귀하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양해바랍니다.”

21세에 7급 시험에 합격하고, 군에 입대하여 복무를 마친 다음, 78년 10월 문교부로 발령을 받아 정부청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이듬해 10월에 10,26사태가 발생했다. 광화문 일대를 군인들이 장악한 광경과 시위로 물든 1980년 봄을 거치면서 혼란에 휩싸였다. 국가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회의가 들어 고민할 즈음 행정고시 합격자들이 사무실로 인사를 왔는데, 자신과 비슷한 또래들이라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상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그동안 성균관대학교 야간에 편입을 하여 공부는 꾸준히 하고 있었기에 무작정 달려들었지만,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감을 잡는 것조차 버거웠고, 1년간은 시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찾는 데도 시간이 부족했다.

대학을 졸업한 82년부터 85년까지 내리 4차례나 2차에서 낙방했다. 급기야 5점차로 떨어지는 데는 무작정 금식기도원에 들어가 버렸다. 일주일을 금식하며 자아반성 기도에 몰두했다. 기도원을 나온 다음부터 성경과 새벽기도에 빠졌다. 평창동에서 밤11시에 출발하여 북한산 보현봉에 올라 밤샘기도를 하고 새벽 3시에 하산을 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자연히 고시공부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포기한 상태에서 본 86년도 시험에서 합격을 했다.

시대의 요청이었을까. 1987년 민주화의 봄이 불어 6,29선언이 발표되던 시기에 사무관 수습을 받고 있었다. 이어서 서울올림픽이 다가오고 있었다. 근무 지망 선택란에 ‘종교, 문화’를 적었더니 문화공보부로 발령이 났고, 덕분에 88서울올림픽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올림픽조직위원회의 실무를 맡아, 대한민국이 종합4위의 기적을 이루는 데에 행정적 역할로 일익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이 샘솟았다. 그때의 행정적 경험이 평창올림픽까지 이어져서 평창에서도 조직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문화부가 신설되고 이어령 초대문화부장관의 비서로 발탁되었다. 서울올림픽에서 활동성과를 인정받은 덕분이다. 이어령 장관을 도와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세계의 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와 연구 그리고 문화정책을 탐구하였고, 이후 문화정책 공직자로서 또는 학자로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힘들게 고생하셨다는 말에, “흔히들 고생 고생 하는데 나에게 모든 역경은 없다. 단지 성공과 보람과 역사를 구성하는 소중한 경험이 있을 뿐이다.”라는 자경문을 보여주었다.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다 보니 박원장은 독서광이자 방대한 도서 소장가이기도 하다. 용인 수지지구 60평이 넘는 아파트는 거실을 빼고 9,000여권의 책으로 가득하다. 또 공직생활을 하면서 모은 방대한 자료는 집안의 모든 가구를 잠식하고 있다. 집안 전체가 문화정책 박물관이다. 유일하게 비어있는 거실은 현재 강의실로 이용되고 있다.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 아침10시부터 오후4시까지 후배양성을 위한 강의가 이어진다. 수강생은 주로 대학생과 대학원생들로 비젼을 꿈꾸는 미래세대들이다. 주제는 <4차 산업혁명과 문화융합>이다. 엘빈 토플러가 언급했듯 한국은 4차 산업혁명 선두그룹 5개국 가운데 하나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인공지능(AI)의 시대를 예고하고 준비를 하고 있지만, AI시대의 인류를 위한 문화와 인문학적인 전망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수강생들의 학습목표는 4차 산업혁명의 기술과 인공지능의 미래를 이해하고 문화적 접근을 통해 인문학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또 박원장이 대표를 맡고 있는 Korea Maestro Network 한마당(韓磨堂)은 문화 분야 전문가들의 학술단체로 포럼, 연구, 출판, 강연, 컨설팅 등을 네트워크 형태로 일정부분 공유한다.

미래세대에게 지적자산을 남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창조적인 문화정책을 도출하고, 문화수요의 현장적용 중심으로 연구, 정책의 발전을 도모하여 비용유발구조가 아닌 이익창출구조로 운영할 계획이다. 2016년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마친 브랜드로 2018년 하반기부터 운용된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문화사업에 관심을 가진 분은 연락하여 주시기 바란다.

자신의 정신과 혼이라는 고향 울진에 대한 소감을 여쭈었다. 박원장의 관심은 여전히 울진의 미래세대에 있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어 주고 싶다고 한다. 울진의 후학들에게 “도전하라. 선배를 활용하라. 세계로 나아가라. 태평양 파도처럼, 덕구온천 용출수처럼, 금강송 기백처럼”이라 당부했다. 또 울진은 자랑스런 경관과 생태문화관광도시라는 브랜드를 최대한 활용하고, 금강송과 향토미, 토염, 청정해산물 등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는 정책과 홍보를 제시했다.

지식이 홍수같이 쏟아지는 그분의 말씀은 가치도 높았지만 분량도 많다. 흥미와 가치 그리고 분량을 조절하는 데에 애를 먹었지만 판단은 독자님들께 맡긴다.

<박광무 원장 주요학력> 방송통신대, 성균관대, 서울대 행정대학원, 미주리대 연수, 성균관대 국정대학원, 고려대 언론 문화 최고위, 서울대 방통통신정책과정 국가정책과정(박사), 아나운서 CEO1기, 카네기 49기


                                                                    /임명룡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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