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문(시인, 논설위원)

 

장마를 핑계로 며칠 밭에 나가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 한낮 밭을 찾았다.

토마토는 곁순이 나와 한 뼘이나 자랐고, 오이는 덩굴손들이 지주대의 그물 끈들을 잡지 못해 바람에 건들거렸다. 밭가에 심은 호박은 엉뚱한 데로 자기 영역을 차지하여 뻗어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감자, 마늘, 양파를 거둔 빈 밭과 파밭은 그야말로 풀밭이다. 녹음방초의 계절답게 일부 비닐을 깐 곳도 빈 틈새로 풀들이 무성하다. 『곡식은 주인 발걸음에 따라 자란다.』는 말이 실감났다. 뙤약볕 아래 채소밭에 풀을 뽑고 빈 밭의 풀들은 낫으로 베어 눕혔다.

이처럼 모든 풀들은 태생이 누가 뿌리지도 않았는데, 잘도 올라오고, 농작물을 압도하여 자란다. 한마디로 『독야청청』하는 존재다. 조그만 밭뙈기 하나 농사짓는 데도 봄부터 풀과 씨름했다. 공해 우려가 있음에도 농민들이 비닐을 깔고, 제초제를 뿌리는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울진에서는 논밭에 풀매는 것을『지심 맨다』고 한다. 여기서 지심(또는 기심)은『들풀』 또는 『잡초』의 사투리다. 들풀을 달리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 잡초다. 잡초의 사전풀이는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불필요한 식물들』이다.

하지만 잡초가 정말 불필요한 식물일까? 지심(地心)을 한자로 써서『땅의 마음』으로 해석한다면 지심이야말로 생태계 먹이사슬 중 가장 밑바닥에서 다른 목숨을 먹이로 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먹이가 되어준다. 또 가뭄을 미리 막고, 수분을 머금어 흙을 살리는 고마운 존재이다.

이처럼 우리가 재배하는 농작물도 처음엔 쓸모없는 들풀이었다. 가까운 예로 산나물, 들나물이었던 명이, 곰취, 곤드레, 냉이, 해방풍, 쇠비름, 민들레 따위가 이제는 밭에서 기르는 어엿한 농작물이 되었다. 얼마 전 어느 분이 갓 재배한 해방풍을 주었는데, 그 알싸한 향기가 아직도 뇌리에 맴돈다.

요즘 쇠비름이 한창 밭에서 자라고 있다. 쇠비름은 항암 등의 약효가 있어 차로 끓여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볕에다 말려 보았다. 그런데 웬걸, 일주일을 땡볕에 말려도 이놈들이 퍼덕퍼덕 살아 있다. 할 수 없이 삶아서 나물로 말렸다. 나는 지금껏 목숨줄이 질긴 풀로 밭에 나는 바랭이를 최고로 여겼다.

아침이슬 같은 물기만 있으면 기어코 뿌리를 내리는 바랭이도 햇볕에는 반나절이면 생기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쇠비름은 그렇지 않았다. 쇠비름의 질긴 목숨줄은 보통 식물과는 다른 특이한 광합성작용 때문이라고 한다.

보통 식물은 낮에는 숨구멍을 열고 광합성 작용을 하다 밤에는 숨구멍을 닫는데 쇠비름은 정반대로 낮에 숨구멍을 닫기 때문에 뜨거울 때 수분이 증발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한방에서는 이런 쇠비름을 오래도록 약재로 먹으면 장수한다 해서『장명채(長命菜)』라고 한다. 그러니 불필요한 풀이란 원래 없고, 쓰임에 따라 잡초도 약초로 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유기농을 고집하는 친구의 얘기로는 풀과 더불어 살면 그렇게 풀을 원수같이 대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식물을 필요와 불필요에 따라 유익초와 잡초로 나누는 것은 일종의 이분법적 고정관념이라는 것, 관행농법을 버리고 유기농법 등을 하느라 무진 고생을 하면서도, 그 친구는 풀과『공존공생전략』을 택했다.

그 전략이란 비료,농약,제초제 금지, 풀은 뽑되 농작물을 압도하지 않도록 자라게 하고, 목초액 같은 식물성 농약으로 병해충방제를 하는 것 등이다. 그러니 관행농법에 익숙한 내 눈에는 그의 밭은 풀밭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농사 초보인 내게도 밭의 풀은 성가신 존재다.

어쨌든 나는 오늘도 머리로는『세상에 쓸모없는 잡초는 없다』라는 고상한 생각을 하면서 잡초 무성한 밭에서 『독야청청』하는 풀들과 한바탕 대결을 한다. 양손에 호미와 낫을 들고, 온몸은 뜨거운 햇볕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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