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지난 6월 23일, 전국날씨는 군데군데 간간이 비가 내렸고, 서울은 잔뜩 흐린 채 습도가 높은 그저 그런 장마철 날씨였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 파란만장한 사연을 남긴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그날 오전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6번의 국회의원과 두 차례 국무총리. 5,16이 있던 1960년부터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 현대사는 그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한동안 정치에서 떠났던 그는 노년에 다시 정계로 복귀하면서 마지막으로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고 했다. 매번 그의 선문답式 메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뭉뚱그려온 언론들은 그의 고향인 서천, 그리고 충청도 일대를 자신이 총재로 있는 자민련으로 채우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했다.

경기도 파주에는 이름도 고운 <자운서원>이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건물의 배치도 뛰어나거니와 서원과 어울리는 주변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특히 가을이면 서원 경내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노랗고 빨간 단풍을 쏟아놓아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하는데, 임진강변에 노을까지 지는 날은 더할 나위 없이 장관이다. 그리하여 말도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점찍어 둔 곳이기도 하다.

자운서원은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어 1650년(효종 원년)에 자운(紫雲)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보랏빛 구름’이다. 이유는 1584년 정월 16일 율곡이 대사동(안국동) 자택에서 운명하던 날, 새벽에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 손톱과 발톱을 말끔히 자르게 하고 의건(衣巾)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그날, 율곡의 고장 파주와 임진강 일대에 보랏빛 노을이 처연하고도 장대하게 펼쳐져 ‘서쪽하늘을 불게 물들였다.’

자운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피하지 못했다. 사액을 받은 서원 하나는 보존한다는 원칙마저 무시하면서 훼철하였다. 그 후 폐허만 남아서 비석들이 나뒹굴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 마을이 생기고 흔적마저 희미할 즈음 그 지방 유림들이 위패를 얹을 사당만 모양새를 꾸렸다.

그 뒤 1975년에는 정부에서 마을 12가구 주민들에게 보상하여 이주를 시키고, 일대를 대대적으로 성역화 하였다. 총 진두지휘는 김종필 국무총리였다. <紫雲書院>이란 편액의 글씨도 직접 썼다. 사람들은 율곡을 떠올리면 한 인간의 생애에 그토록 많은 삶의 무게를 남겨둘 수 있음에 경외감이 든다. 편액을 쓰면서 김 前총리 자신도 이 세상에 삶의 무게를 남기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고향 충남 서천 서쪽 하늘도 노을이 붉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김 前총리가 쓴 <紫雲書院>이란 편액을 지금은 볼 수 없다. 2000년대 들어서 김 前총리가 남긴 글씨들은 온갖 수난을 당한다. 한밤중에 자운서원 편액의 낙관이 칼로 난도질이 돼있기도 하더니, 결국 ‘雲庭(김종필의 호)’이란 낙관들은 모조리 파내졌다.

자운서원도 그렇고 화산서원도 그렇게 주련과 편액들이 모조리 도려내지고 말았다. 의원내각제를 자신의 삶의 무게로 여기고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었던 김 前총리는 자신이 원하던 대한민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실을 지켜보면서, 장마철 그저 그런 날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운명했다.

한편, 퇴계가 운명하던 날의 기록을 보면, “섣달 여드레, 아침에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고 하셨다.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파랗던 하늘에 갑자기 흰 구름(白雲)이 몰려와 지붕 위에 모이더니 눈(雪)이 내려 한 치 남짓 쌓였다. 잠시 뒤에 선생이 자리를 정돈하고 부축해 일으키게 하시고 일어나 앉아서 제자 등에 기대어 서거하시니, 곧바로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그쳤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는 광경을 제자 이덕홍이 보고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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