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입추가 지나도 폭염으로 잠 못 드는 열대야다. 쉬이 잠들 것 같지 않아 캔 맥주를 사들고 근처 산기슭 공원을 찾았다.

밤 열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운동을 나온 사람들은 전깃불이 대낮같은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고 있다. 야외 스탠드에 누워 몇 개 안 되는 밤별을 세어본다. 그리운 그 저녁들을 떠오른다.

내 고향 울진 산골은 1977년 여름이 지나서야 전기가 들어왔다. 누가 촌놈이라 놀리면 나도 20세기에 전기를 써 본 사람이라고 맞받아친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6백만 불의 사나이’가 어떻고 ‘원더우먼’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산골의 밤도 결코 외롭거나 심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사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그 이야기꾼들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이북 사투리를 쓰던 보따리장수 인삼 할머니다. 웬만한 남정네보다 키도 크고 몸집도 건장한데 걸망에 인삼 보따리를 지고 마을에 나타나면 온 동네가 시끌시끌하다. 그 여장부가 우리 집 삽짝을 들어서며 억센 이북 사투리로 인사를 하는데, 삼이웃이 들리도록 욕설은 또 얼마나 차지게 잘 하던지, “이 집에는 OO년들이 몇인데 마당 꼬라지가 무시기 이따굼둥!” 한다.

한여름 밤, 멍석을 깔고 저녁을 먹던 식구들은 화들짝 일어나서 분주히 인삼 할머니를 맞이한다. 여장부의 기에 눌려서 피하는 건지, 상스러움이 껄끄러워서인지 아버지는 모깃불을 돋워놓고 방으로 들어가신다. 누나들은 부엌에 달려가서 밥이며 막걸리를 내오고 어머니는 둥근 밥상에 자리를 트는 동안 “숟가락만 개져오라우”하고는 커다란 양재기에 삶은 감자와 남은 반찬들을 몽땅 부어넣고 먹다 남긴 밥까지 박박 긁어 쓱싹쓱싹 밥을 비비는 품새가 호걸 장비다.

놋숟가락에 크게 떠서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시집 간 큰 딸이 아를 뱄더랬지비? 기래 아들 낳수래 딸 낳수까래?” 그렇게 시시콜콜 우리 집 뿐 아니라 산골 전체를 넘어, 여장부는 세상사를 다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 많은 비빔밥을 다 먹고 막걸리 한 주전자가 비워질 동안 쉴 새 없이 자신이 지나 온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시절에도 YouTube가 있었더라면 ‘먹방’으로 스타가 되고 남을 분이었다. 내게 그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는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원래 아버지의 자리인 살평상을 통 차지하고는, 곰방대로 잎담배를 피우며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들려줄 때는 그 분이 ‘6백만 불짜리 원더우먼’ 같았다. 이튿날 새벽에 여장부가 떠나고, 살평상 위에는 커다란 인삼 한 뿌리와 산신령이 그려진 인삼과자 두 통이 놓여있다.

두 번째는 대자리를 엮던 앉은뱅이 도사님이다. 한때 우리 산골 꼬맹이들에게는 ‘도사가 높나 박사가 높나’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우리들끼리 내린 결론은 도사가 더 높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박사를 본 적이 없었다. 도사는 가끔 마을에 나타나 한 해 여름을 나고 사라졌다. 박사 보다 높은 그분의 체구는 꼬맹이들보다 낮았다. 하반신 장애인으로 소위 앉은뱅이였기 때문이다.

휠체어가 없던 시절 지게나 리어카로 이동했다. 그분의 직업은 대자리를 엮는 기술자였다. 그러나 자신은 도술을 부리는 도사라고 했다. 물건이 손에서 사라졌다가 나타기도 하고 다른 물건으로 바뀌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분은 눈을 감고도 대나무자리를 완벽히 만들고 헤진 대자리도 새것처럼 고쳤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천정을 향해 눈을 깜빡거리지만, 그분은 시각장애인이었다.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없었는데 특히 무서운 얘기를 잘 했다. 무서운 순서대로 귀신을 나열하면 백 가지도 넘었다. 염불도 잘하고 한문도 잘 외웠는데, 공자님이 사람고기로 만든 젓갈을 즐겼다는 말을 했다가 아버지한테 한 소리를 들은 후로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별이 손에 닿을 듯 쏟아지는 한여름 밤,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서 들었던 옛날이야기들이 그리워 질 때 쯤, 전기가 들어와 선풍기를 틀고 TV 앞에 앉아 가끔 모기장 밖으로 마당을 멀끔히 바라보면 처연한 달빛만 마당에 그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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