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 스님(이규훈)

 

광복절을 보내며, “내 코앞이 석자라는 吾鼻三尺”을 떠올려 본다.

증언들에 따르면, 상해임시정부는 말이 정부이지 허술한 창고에 용품이라고는 사과궤짝 같은 것 몇 개가 전부였고, 그것이 밥상이자 의자이며 침상이었다고 한다.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가운데, 유일한 수입원자 끼니해결은 중국어 연설로 중국인들을 통곡하게 만들었다는 몽양 여운형선생이 책임졌다.

당시 상해는 국제도시였고 전차에서 영어, 불어, 중국어 등으로 안내방송을 했다. 다국어 구사가 가능했던 여운형선생이 전차회사에서 받은 일당으로 몇 개의 호떡을 사와 나누어 먹는 게 고작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임시정부 이동녕 국무총리가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 정부에 절박함을 호소했으나, 회신조차 없다가 한참 뒤에 ‘吾鼻三尺’이라는 냉담한 네 글자만 돌아 왔다. 이때까지 중국정부는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움으로서 중국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만주국(중국)을 병참기지화 한 사실에 주목하는 열강들의 눈을 따돌리기 위해 상해 거리에서 중국인이 일본인 승려를 살해했다며, 들어 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 결국 외국인 거주 지역[租界]을 경비하던 일본군과 중국 십구로군 사이에 전투가 일어났고, 15만의 중국군이 5만의 일본군에게 참패당함으로서,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이때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선생의 주도로 윤봉길의사는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天長節]이자 상해점령 전승기념행사에 폭탄을 던졌다. 일본 문무고관들이 사망 또는 중상을 입는 거사를 성공시켰다. 이후 미주리 함상에서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항복조인문서에 서명을 한 외무대신 시게미스(重光)가 외다리가 된 것도 이때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장개석은 “중국의 10만 대군도 못할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하다니, 윤봉길 길이 빛나리” 라 칭송하였고 임시정부에 회담을 자청하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김구는 장개석의 자택에서 회담을 했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를 넘겨받았다. 일본의 간섭으로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때 길러낸 투사들이 조선광복의 주축이 되었다.

전쟁의 핵심은 주력부대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주력부대는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해서 중국동북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이다. 관동군은 조선독립군과 중국, 러시아에 막혀서 더 이상 전쟁수행이 어려워졌고, 전쟁물자조달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전선의 다변화를 선택한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물자를 가져오기 위해 미군기지(하와이)를 공격하였고, 이를 기화로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미국이 2차 대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조선독립군들의 저항으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전선을 2곳으로 나누었고, 미국이 개입함으로서 폐망했다는 것이다.

2차 대전이 연합국승리로 가닥이 잡히자,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이 전쟁 후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을 논의했다. 이때 바다 밑 암초까지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시켰고, 역사적으로 조선은 중국의 속방(屬邦)이라고 생각했던 장개석이 예상과는 달리 카이로선언 3항에 ‘조선인민의 고통을 감안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독립시킨다.’라고 명시했다. 이것은 당시 국제질서에 있어서 이례적 사건으로 조선독립을 인준한 유일무이한 문건이다.

광복73주년! 임시정부를 생각하고 독립투사들을 기리며 윤봉길의 의거를 말하면서도,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베푼 은혜로서 해방(解放)을 맞이했다는 식민사관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재편을 꿈꾸던 일본제국주의 앞에서 내 코앞이 석자라며 쩔쩔매는 덩치 큰 중국과 달리 조선의 청년들은 당당했고, 그 결과 광복을 쟁취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연합군 승리에 기인한 해방이 아니라, 우리가 당당히 쟁취한 광복임을 가슴에 새기고 후손에 물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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