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매리 출신 창유계 사건 독립유공자
지난달 9일 금매리 묘소에서 고유제 지내

 

지난 8월 15일 광복 73주년을 맞아 정부는 울진군 매화면 금매1리 故 남정성(南精性 1916-1950. 異名 南精奎)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남정성 애국지사의 손자인 상균, 철균 형제는 지난 9월 9일 고향마을 지사의 묘소에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이 자리에는 전광순 울진군 광복회장, 남경탁 6.25 민간인 희생자 울진군유족회장, 윤근오 울진향교 전교, 영양 남씨 문중 및 유림 등 60여명이 참석해 남 지사를 추모했다.

남 지사의 장남 남두열씨는 1991년부터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2015년 작고하였는데, 손자인 상균, 철균 형제가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노력한 결과, 이번에 추서된 것이다.

남정성 지사가 이번에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뒤늦게 인정받아 약 27년만에 서훈됨으로서, 울진의 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체였던 창유계(暢幽契)’원들의 서훈 애국지사는 모두 20명으로 늘어났다.

그간 정부는 1982년 광복절 행사시, 혹독한 고문을 받든 중 사망하거나 결국 감옥살이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창유계원 22명 중 남정성 지사와 월북한 2명을 제외한 19명에 대해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한 바 있다.

남 지사의 서훈 지정이 늦어진 것은 6.25 발발과 함께 자유당 정부의 용공분자 처결과정에서, 보도연맹원 및 단순혐의자에 대한 경중의 선별없이 희생시킨 울진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의 피해자였기 때문이었다.

남정성 선생은 독립을 보았으나, 창유계원들의 또 다른 목표였던 사회개혁 운동에 매진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자유주의로 전향하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이 화근이었다.

남정성 지사는 1938년 일제말 조국의 독립과 사회개혁을 목표로 죽변리 사덕수의 집에서 조직된‘준향계(準香契)’의 일원이었고, 1939년 10월에는 이를 확대 조직한 창유계(暢幽契)’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창유계는 1943년 3월에는 중국의 임시정부와 연계하기 위해 계원 남원수(南源壽)를 만주로 보냈고, 같은 달 19일에는 계원 장세전(張世銓)을 중경(重京)으로 보내기로 하였으나, 출발 전날 일경에 발각되었다.

마침 다음 회합을 위해 집회통지서를 돌리던, 청년이 근남면 수산천 도선장에서 검거되어 창유계의 전모가 밝혀져, 관련자 102명이 울진경찰서에 체포되어 그 중 61명은 무혐의로 석방되고, 41명은 구속 수감되었다. 그 중 남정성 애국지사 등 핵심 주동자 21명과 울진경찰서 고등계 형사 이광호가 만주에서 체포해 온 남원수 등 총 22명에 대해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머리에 검은 보자기를 씌우고 고문을 자행한 일명 창유계‘흑두건 사건’이다. 나체에 전기줄을 얽어매어 전기를 통하는 전기고문, 세모난 장작위에 무릎을 꿇리고 구둣발로 내려밟는 진압고문, 생손톱을 뽑아내는 고문 등이다.

5개월간 일제의 혹독한 고문 끝에 남원수, 남지학, 이두연, 전만수, 전원강, 최황순 6명은 순국했고, 나머지 16명은 대구형무소로 넘겨졌다. 대구형무소에서의 예심과 재판과정에서 3~8년을 선고받았으나, 더욱 잔인하고 혹독한 고문으로 10명이 또 옥사하는 참극을 빚었다.해방과 더불어 임시헌, 남정성, 최효대, 주상준, 최연덕, 남용식 등 6명이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생환하였으나, 대부분 그 후유증으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다.


                                                                       /전병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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