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나이를 먹어가니 탈모(脫毛)가 심각하다. 쉰 중반을 지나면서 급속도로 머리숱이 줄어든다.

그래서 최근에 나는 빨강색이 짙은 세숫대야를 샀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또 머리를 행굴 때마다 빠진 머리카락 무더기가 흰색 세면대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너무 마음아파,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싶어 짙은 색깔 대야로 바꾸었다.

그렇게 마음으로는 탈모를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빠진 머리카락이 배수구로 쓸려 들어가는 것은 현실이고, 그때마다 속이 쓰려 차마 볼 수가 없다.

한자 ‘필수(必須)’ 라는 단어에서 ‘모름지기, 마땅하다’ 라는 글자 ‘須’ 를 보면 머리(頁)에 앞 머리카락(彡)이 풍성한 모양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머리카락이 풍성해야 한다는 뜻 같아서 탈모인 입장에서 그 글자가 썩 마음에 안 든다. 그런데 그 글자에 딱 맞아떨어지는 남자 머리모양이 근래 유행한 적이 있다. 소위 ‘투블럭’이라는 헤어스타일인데 앞머리와 윗머리만 남기고 돌려가며 말갛게 깎은 모양이다.

열 살 아래인 처남이 그 머리스타일을 하고 온 적이 있다. 나는 앞머리가 풍성한 처남을 보고 질투가 나서 온갖 유언비어를 만들어서 놀렸다. “그 머리는 남자를 아주 못생겨보이게 만드는 모양새인데, 외모로 자랑할 것이 앞 머리카락밖에 없는 사람들만 따라하는 유행”이라고 놀려댔다. 실제로 미남과는 거리가 멀고 개성이 강하다는 소리를 주로 듣는 남자 연예인들이 선호했던 스타일로, 남자들의 외모를 하향평준화로 몰아갔던 그 ‘투블럭’ 유행은 금방 사라졌다. 탈모인 입장에서 참으로 다행이다.

15세기 유럽, 부르고뉴 공국(公國)의 선량공 필립은 두피(頭皮)에 지루성 피부염이 생겨 주치의가 머리카락을 면도하도록 권유했다. 졸지에 대머리가 된 선량공은 모든 귀족들의 머리를 자신과 똑같이 밀도록 명령했다. 피터 폰 하겐바흐에게 지시하기를 머리 밀기를 거부하는 귀족은 체포하여 강제 면도를 시키도록 했다. 그 바람에 느닷없이 부르고뉴 공국은 대머리 나라가 되었다. 선(善)하다는 의미에서 별명이 선량공 필립(Philip the Good)으로 불린 그도 자신이 대머리라는 것에는 참을 수가 없었나보다.

선량공의 머리카락 면도 일화에서 나는 문득 추측한다. 옛날 몽고식 변발도 그렇게 해서 탄생한 헤어스타일은 아닐까. 我Q정전의 Q자 모양의 황비홍식 변발이나, 일본 사무라이의 ‘촌마게’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탈모인이 되고 보니, 세상에서 스스로 선택해서 대머리가 되고 싶은 사람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선량공 필립처럼 몽고의 칸이나 일본의 쇼군이 신하들에게 강제로 머리를 밀게 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칸이나 쇼군이 대머리라면 부하들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얼마나 부럽고 질투가 났을 거며 신하들은 또 얼마나 눈치가 보였겠나.

눈치가 재빠른 대신(大臣) 하나가 자진해서 머리를 면도로 밀고 나타나서는 “투구를 쓰고 전쟁을 하자니 머리카락이 자꾸 걸리적거려서요.”라는 핑계를 대면, 칸이나 쇼군은 그를 가장 먼저 진급시켜 바로 옆이나 앞에 두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선량공처럼 강제로 머리를 밀게 하지 않아도 일사천리로 모든 신하들이 따라하게 마련이다. 그 때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투블럭을 하고 온 신하가 있었더라면 아마 그의 목은 온전치 못했으리라. 중앙의 권력이 강력할수록 강제보다는 핑계거리 좋은 아부가 더 잘 통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변발들이 세상에서 유행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런 엉뚱한 상상들이 머릿속에서 활개를 치는 것도 어쩌면 없어진 머리카락이 너무 아쉬운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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