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머리를 깎으러 동네 미용실 이발의자에 앉아 있자니 옆에 붙은 피아노 학원에서 서투른 솜씨로 <클레멘타인>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머리를 손질하던 단골미용사가 “형님도 이제 머리숱이 많이 세었네요, 아직 젊으시니까 염색을 하시지요.” 겉으로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당신도 이제 늙은 아비라는 소리다. 미용실 안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힙합 스웩(Swag)이 왁작거린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OO야, 너 스웩(Swag)이 무슨 뜻인 줄 알아?”

동요 <클레멘타인>을 들으면 누구나 바닷가의 외딴 오두막을 떠올린다. 내 어린 시절에도 그런 집이 있었다. 개천 다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아주 낡고 오래된 움막이었다. 그 오막살이에는 클레멘타인 같이 예쁜 소녀는 없었고, 넝마 망태를 걸머지고 폐지를 줍던 넝마주의, 이른바 근로재건대 아저씨 한 분이 살았다.

그 시절 넝마주의 또는 양아치로 불리던 근로재건대는 일반사람들의 기피대상 1호였는데, 그 분은 의외로 착한 사람이었고 아이들에게도 잘 대해주어 꼬맹이들도 겁 없이 곧잘 따랐다. 동냥자루나 넝마 망태를 호주 사투리로 스웩(Swag)이라 했다. 그것을 걸머지고 다니는 사람을 ‘스웩 맨’이라 불렀다.

넓고 넓은 바닷가의 <클레멘타인>, 그러나 원곡의 배경은 바닷가가 아니고, 깊고 깊은 산골짜기 광산이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1848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지방에 황금이 발견되었다. 누구는 산에 오르다 금맥을 찾았다고도 하고 또, 냇가에서 주먹만 한 금덩어리를 주웠다는 소리도 들렸다. 미국이라는 드넓은 땅에 소문이 퍼지는 데에 1년이 걸렸다.

이듬해 1849년에는 곳곳에 금을 캐는 광산이 개발되어 사람들은 서부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미국 동부 뿐 아니라 멀리 태평양을 건너 중국 사람들까지 일확천금을 노리고 캘리포니아 깊은 계곡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렇게 1849년 한꺼번에 황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가 광부가 된 그들을 세상 사람들은 ‘Forty-niners’라 불렀다.

원곡 <클레멘타인>의 아버지는 ‘포티나이너’였다. 원곡은 “깊고 깊은 산골짝에 오막살이 집 한 채, 포티나이너 아버지와 예쁜 딸이 살았네”로 시작된다. 즉 마흔아홉의 늙은 애비가 아니라 1849년 금 캐러 들어간 광부라는 소리다. 황금을 노리고 서부로 몰려든 사람 중에 실제로 금을 발견하여 떼돈을 번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상대로 숙박업을 했던 사람들이 돈을 벌고, 낡은 천막을 재활용해서 작업복 청바지(리바이스)를 만들어 팔았던 형제들이 떼돈을 벌었다. 도박장과 술집도 ‘포티나이너’들의 주머니를 털어갔다.

이와 비슷한 시기 1851년 호주에서도 골드러시가 벌어졌다. 포티나이너였던 어떤 사람이 호주 빅토리아 주에서 캘리포니아 금광 지대와 비슷한 지질 대를 발견한 것이다. 드디어 호주의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과거로부터 호주는 목축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목축업에 종사하던 인부들이 금광이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동남부로 대거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호주의 광부들도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천금을 만진 사람은 극히 일부였고 10년도 못가서 골드러시는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광부들은 다시 일자리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을 반기는 곳은 없었다. 목장 주인들은 부족한 인부를 대신할 울타리를 개발했고, 양털을 깎는 기계들이 속속 공급되었던 것이다. 광부들은 동냥자루를 뜻하는 스웩(Swag)을 짊어 매고 이리저리 떠돌게 된 것이다.

내 어린 시절 보았던 바닷가의 재건대 아저씨도 아마 그랬으리라. 산업화를 따라 동네 머슴을 그만두고 도회로 나갔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반겨줄 이 없는 고향으로 넝마 망태를 걸머지고 떠돌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에게도 클레멘타인 같이 예쁜 딸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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