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 스님(이규훈)

 

<지난 호>에서 (집이) 본래의 목적보다는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면서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집 때문에 살아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고, 삶의 많은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자연환경에 따라 에스키모들이 얼음집을 짓고 몽골초원에 게르가 세워지듯 집의 형태는 삶의 방식을 좌우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중국 문헌인 《후한서》 동이전에는 ‘성곽을 쌓지 않고 흙으로 방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고(室形如冢), 그 위에다 문을 만들었다’ 고 적고 있으며, 《진서》 는 ‘여름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에는 굴속에서 산다 (夏則巢居冬則穴處) 고 했다. (우리말의 상상력,1991.) 중국인들이 이렇게 기록했다는 것은 그들과 주거방식이 달랐음을 말한다.

집에 온돌이 있으면 무조건 한옥이라 해야 한다. 그래서 바닥 난방을 하는 아파트도 한옥이라고 주장할 만큼, 온돌은 우리민족 특유의 난방법이자 주거의 주된 요소이다. 현재와 같은 온돌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고려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온돌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은 신석기 청동기시대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말에서는 더욱 뚜렷해진다.

우리민족은 굴을 만들어 살았다. 온돌의 우리말은 구들이다. 구들은 ‘굴+들여놓다.’로 이루어진 말로서 굴 안에 설치된 생활시설임을 알 수 있다. 구들이라는 말을 통해 천렵에서 임시 화덕을 만들고 돌을 달궈 삼겹살을 구워먹듯, 굴(방) 한 곁에 서로 마주보는 돌기둥을 세워 그 위에 널찍한 돌을 올려놓고 불을 지펴 음식을 익혀먹었음을 상상해 본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으로 돌은 오랫동안 열을 간직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며, 그 열로 젖은 것을 말리기도 하고 잠을 잘 때는 추위를 이겨내는데 이용하는 등 쓰임새를 넓혀갔을 것이다.
그래서 물기가 있는 것을 구들 위에서 말리면 ‘꾸들꾸들’ ‘꾸덕꾸덕’하게 되고, 열기는 몸에 불이 직접 닿는 ‘따끔’ 보다 덜해서 기분이 좋으니 ‘따끈따끈’ ‘뜨끈뜨끈’이 된다. 우리의 말과 글을 한문이 한바탕 휘저었고 현재는 영어가 뒤덮고 있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듯 우리들의 집에는 겨레의 삶이 배어있다.

침대에서 생활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죄송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럽고 황당한 자랑이 침대 자랑이 아닌가 싶다. 지난 호에서 방바닥이 차서 맨바닥에 눕고 앉을 수 없어 발을 단 것이 침대요 의자요 식탁이라 했다. 이렇다보니 그들은 실내외 구분없이 신발을 신고 살 수 밖에 없는 매우 비위생적인 주거구조를 가지고 있다. 비위생적이라는 평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흙벽이 부슬부슬 떨어져나가고 연기에 시꺼멓게 그을린 초가집과 비교하여 쉽게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겉모습은 그렇더라도 실상은 매우 위생적이다. 왜냐하면 불을 땔 때마다 구들장과 고래 틈으로 새어나오는 연기가 집을 훈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기의 살균작용으로 고기가 훈제되어 썩지 않고 오래도록 보관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현대식으로 공들여 잘 지었다는 집들에도 여름장마철이면 제습기를 틀어야 하고 옷장에 제습제를 비치하는 등, 별의별 수단을 동원해도 집안 곳곳에 피어나는 곰팡이는 골칫거리다. 이때 우리 조상들은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온도와 기압에 차이로 아궁이의 열기가 굴뚝까지 다다라 상승기류를 만들기 전까지 연기가 아래로 깔리면서 집안 구석구석이 훈증되어 살균을 마친다.

이때 쯤 방구들이 뜨끈뜨끈 달아올라 방안의 습기는 물론 매캐한 흙냄새까지 사라진다.
우의(雨衣)를 걸쳤다고는 하지만 장마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막지 못해 거의 날비를 맞으며 바깥 일을 하는 몸에는 풍습(風濕)이 찾아 든다. 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약간 뜨겁다 싶은 온돌에 밤새 지지고 나면 몸은 거뜬해진다. 이처럼 우리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온돌 집은 가히 인류 최고의 주거구조임은 분명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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