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준 문화원장의 민담순례 4

 

울진읍 명도2리 ‘아산동’ 마을을 지나 서북쪽 방향의 포장도로를 따라 언덕길을 올라가면, 속칭 ‘세거리(三街)’ 라고 불리우는 고개 정상에 이른다.

세 마을로 갈라지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세거리의 중앙에 둘레석으로 잘 단장된 쌍분과 비석을 볼 수 있다.

비석의 주인공은 ‘노원달(盧元達)’ 효자이며, 쌍분은 ‘노원달’ 효자와 부인인 ‘仁同 張氏’ 의 묘다. 효자의 諱는 원달(盧元達), 字는 종선(鍾宣)이며, 1906년 울진읍 명도리에서 노치복(盧致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달(元達)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말씀에 거역하는 예가 없어 사람들은 그를 ‘하늘이 내린 효자’ 라고 극찬하였다.

1923년 2월 한창 맹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원달(元達)의 부친이 원행(遠行)을 하였는데, 느닷없이 객지에서 사망하였다는 비보가 잔해졌다. 원달 효자는 당시 14살의 어린 나이라 엄동설한에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으나, 문중 어른들과 상의하여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번도리를 찾아갔다.

여주 땅은 유난히 추워 모든 산야가 꽁꽁 얼어서 매장을 할 여건이 아니었다. 부득히 인근 야산에 가매장을 해놓고 귀향했다. 고향에서 3년 상을 치른 후 16세의 아직은 어린 나이였지만, 단신으로 여주로 다시 갔다. 도착해서 파묘를 해 보니, 납골이 거의 되지 않은 상태였다.

원달은 시신을 정성껏 수습하여 양 어께에 걸빵을 만들어 짊어지고 고향으로 향했다, 납골이 덜된 시신이라 갈수록 더 무거웠지만, 울진까지 1,200여리를 주야로 걸어 5일만에 도착하였다.
명도리가 내려다 보이는 세거리 중전곡(中田谷) 언덕에 당도하자, 효자 원달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과 문중 어른들은 원달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이 들었든지, 기진한 것이다. 문중 어른들은 덕구마을의 노동숙(盧東熟) 지관에게 묘터를 부탁했다. 지관 어른은 여러가지 상황을 파악하더니, 현재 시신을 내려놓은 장소가 명당이라 하여 바로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됐다.
 

마침 이 곳은 세 마을로 갈라지는 중심지라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데, 오가는 사람마다 원달의 효심에 감복하였다. 효자 원달의 효행은 오랫동안 지역에 회자되어 오다 마침내, 60년이 지난 1982년 1월5일 대한노인회 울진군지부에서 그의 지극한 정성과 효심에 감동하여 표창하였다.

※디지털울진문화대전에는 효자 노원달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소재지 : 울진읍 명도리 산 86/ 孝子 盧元達은 부친께서 여행중 死亡하니, 當時 14歲의 어린 나이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번도리까지 찾아가 屍身을 혼자서 묻고 돌아와 3년후 다시 찾아가 1,200리 먼길을 걸어서 父親의 遺骸를 故鄕 땅에 안장시킨 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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