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문(시인,논설위원)

 

미술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좋아하는 화가와 미술작품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한도歲寒圖』이다.

세한도는 조선 후기 다방면에 천재였던 『추사秋史 김정희』가 남긴 작품이다. 지금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세한도란 『추운 겨울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렸다.

그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불후의 명작, 문인화의 대표작인 『세한도』를 후세에 남겼으며, 불세출의 독특한 글씨체인 『추사체』를 창안하였다. 그가 추사체를 창안하기까지 칠십 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내었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참으로 인고의 노력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해 겨울, 나는 제주도 여행에서 『세한도 복사본』을 샀다. 흐름하고 단출한 집 한 채와 소나무 같은 나무 몇 그루가 그려진 뭔가 좀 썰렁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그림에 호감이 간 까닭은 화려한 채색화가 아닌 담백한 묵으로 그렸기 때문이요, 다른 수묵화와 달리 발문을 꽤 길게 써 놓아 그 내용이 무척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딱딱한 분위기인 내 서재에 걸어두고, 운치를 좀 내보고자 하는 작은 욕심 때문이었다.

추사는 1840년경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비판한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쓸쓸한 유배지에서 모두 다 그를 외면할 때, 제자였던 우선藕船 이상적은 스승 추사에 대한 존경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신의를 보여 주었다.

중인 출신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 연경에 다녀올 때마다 귀한 서책들을 구해 그에게 보내 주었다. 위리안치 유배지에서 오로지 책을 벗 삼아 지내던 추사로선 더없이 반가운 선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의 스승 공경에 어찌 추사가 그 의리를 잊겠는가! 하여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 정성에 크게 감동해 그려준 그림이었다.

제자 이상적은 세한도를 연경에 가져가 당시의 중국 명사들에게 보였는바, 모두다 그의 학문과 예술적 경지를 탄복하는 찬시를 남겼다. 이에 <세한도>는 그들의 찬시가 덧붙여져 길이 10m가 넘는 두루마리 작품이 됐다고 한다.

세한도를 살펴보면 오른쪽 위에 <세한도>라고 예서체로 단정하게 쓴 다음, 왼쪽에는 제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발문을 곁들였다. 주요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의 『만학집 晩學集』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庫』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내주니, 이 모두는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중략)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력과 이익을 좇아 모인 사람은 그것이 사라지면 멀어진다.’(以權利合者權利盡以交)고 했는데,

그대도 세간의 한 사람일진대 어찌 그리 초연한가. (중략) 공자가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더디 시듦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고 했듯이, 소나무, 잣나무(유홍준 교수는 ‘측백나무’로 해석함) 는 본래 사계절 상관없이 잎이 시들지 않고, 지지도 않는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뒤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에도 변함없음을 칭찬하셨다.』(이하 생략)

다시 말해 권력과 이익만을 좇는 시대에 자신을 권력과 이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 인품을 『한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칭찬한 것이다. 하지만 제자 이상적은 도리어 스승의 올곧은 지조와 절개를 존경했던 것.

소나무와 잣나무는 당시 염량세태에도 두 사람의 지조와 의리가 변함없음을 상징한다. 그림 아래쪽 인문(印文) 『장무상망長毋相忘』은 「서로 오래 잊지 말자」는 뜻으로 애틋하고도 돈독한 스승과 제자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시련이 깊을수록 학문과 예술 열정은 더욱 불타오르는가. 유배지에서도 고고한 품격과 기개를 잃지 않은 조선 선비의 위대한 혼이 고스란히 담겨진 그림 한 점, 세한도! 4351년, 무술년도 저물어 간다. 날씨가 갑자기 매서워졌다. 완당阮堂 김정희가 남긴 『세한도』를 이 차가운 계절에 다시 한번 음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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