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서울지사장


 

“와, 죽이네!” 지금은 길거리에서 여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성희롱으로 고소를 당할 일이지만, 예전에는 미인이 남성들로부터 흔히 듣던 농담식 칭찬(?) 이었다.

나 역시 20대 시절에는 휘파람까지 곁들여서 그 짓을 꽤나 했었다. 그런데 이 ‘죽인다’ 라는 표현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왜 하필 ‘죽이네’ 였을까.

개연성이 거의 없고 말도 안 되는 억측 같지만, 나는 그 시작점이 퇴계 이황선생이 아닐까한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덕군자이신 퇴계 선생이 성희롱 장난의 창시자라니 상상이라도 그런 불경죄를 용서할 수가 없다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게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출처는 명확치 않으나 위당 정인보 선생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퇴계 선생이 젊은 시절 과거공부를 위해 한양에 머물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 예안 산골에서 상경한 퇴계가 한 번은 종로 큰 길을 걷다가 우연히 기생들이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퇴계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기생들이 지나가는 것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생들이 얼마나 예뻤던지 한참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이윽고 정신이 번쩍 든 퇴계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한마디 했다. “이 마음이, 나를 죽이는구나.”

위당 정인보는 양명학자였다. 왕수인의 양명학이 조선에 전해져 강화도에서 강화학으로 꽃피어오다 조선의 운명과 함께 사멸해갔다. 조선의 마지막 양명학자였던 난곡 이건방 선생으로부터 사그라드는 불씨를 겨우겨우 전해들은 분이 위당 정인보 선생이다. 위당이 난곡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어려서부터 명석하여 천재 소리를 듣던 위당은 일찍이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맡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일제에 거침없이 쓴 소리를 하던 그를 관료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런 위당이 한 번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저 멀리 초라한 행색의 한복을 입은 노인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가 진흙탕에 넓죽 엎디어 큰 절을 올리더란다. 절을 받던 그 노인이 난곡 이건방이었다.

주자학, 즉 성리학은 마음(心)에서 리(理)와 기(氣)를 분리하여 이기론(理氣論)을 다루는 철학이다. 이에 반해 양명학은 심즉리(心卽理), 마음(心) 자체가 도리임을 주장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 한다. 만사가 마음에 달렸다.

양명학자인 위당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 ‘마음(心)’ 의 중요성을 가르치면서, 퇴계의 ‘종로 기생 목격담’ 을 한 예로 들어 설명했던 것 같다. 마음이 나를 지배한 순간 아무리 도덕군자라도 어쩔 수 없이 넋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퇴계에게서 도리(道理) 를 상실한다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편 조선 최고의 도덕군자께서 예쁜 여자들을 보고 “나를 죽이는구나.” 라고 했다니 사실이라면, 당시 한양 선비들에게 얼마나 큰 화제꺼리가 되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가끔 놀림꺼리도 되고 또, 선비들 사이에 유행이 되기도 했을 것이란 게 내 추측이다.

어쨌거나 내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은 단연코 퇴계 선생이다. 서울에서 36번 국도로 고향 울진을 오갈 때, 봉화군 옆을 지나면서 도산서원과 가까이 스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여길 정도로 우러러하는 분이다. 위대한 철학자로서의 면모도 존경스럽지만, 인간미 넘치는 그분의 성품에 감복한 바가 더 크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분의 일화를 들으면, 마음 따뜻한 고향 할아버지 같아서 더욱 좋다. 데리고 있던 노비가 병에 걸려 흰 염소를 먹어야한다는 소리를 듣고 사방에 수소문하여 구해다 먹인 일이며, 서울의 손자가 젖이 부족해서 고향에 유모를 부탁해왔지만 내 손자 살리자고 남의 자식 굶길 수 없다며, 아들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도 곧잘 하셔서, 손자 안도(安道)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두고 겸사로 한 농담은, “안도 녀석이 과거에 급제했고 게다가 혹 높은 등수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데, 쑥대 그물에 호랑이가 잡힌 격이요, 맹인이 더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격이라 할 만하군. 마음이 기쁘면서도 괴이쩍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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