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스님 (이규훈)

 

최근 들어 도시의 건축물과 편익시설들에 ‘적대적 건축’ 이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적대적 건축’ 이란 노숙자라고 불리는 유랑인들이나 방문판매, 청소년 등의 접근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건축과 시설물들을 말한다.

예를 들면 주차를 해도 문제가 없는 관공서 마당에 미관을 이유로 이동식 화단을 놓는다거나 기차역이나 공원과 같은 다중시설의 긴 의자 중간에 필요치 않는 시설물을 굳이 설치하여 눕지 못하도록 하는 것 등이다.

목적은 다르겠지만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의도적 건축은 건축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본다. 적을 막기 위한 성(城)과 같은 군사시설은 물론, 신전의 계단을 필요이상 가파르게 만들어 종종걸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거나 기어오르도록 유도하고, 사찰과 궁궐 등은 단청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여 경외심을 갖도록 하며, 교회 건축은 파이프오르간 소리의 공명을 계산하여 신비함을 보태고 높다란 탑을 세워 권위로 압도하려 한다.

이처럼 미리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집(건축)에 따라 인간의 행동이 달라진다. 그래서 의식주를 말 할 때는 반드시 의식주의 변화로 인하여 달라지는 문화현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음식에 따라 외식문화가 바뀌듯이 15세기경-「훈몽자회」“椒 고쵸 쵸”, 「구급간이방」 “고쵸 모과 달힌 믈” - 우리나라에 고추가 들어온 뒤 김치가 달라졌고 얼큰한 음식이 생겼으며, 양념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앞선 호에서 말했듯이 온돌은 온돌문화를 만들었다. 잠자리 숫자가 정해진 침대와 달리 여러 사람이 한 방에서 잠을 자기 때문에 친척을 살붙이라고 하며, 이부자리를 펴면 침실, 음식이 들어오면 식당, 각자 나름의 작업실 등으로 순간순간 변화가 용이한 특성을 지닌다.

이처럼 온돌에서의 전통생활은 이부자리를 걷고 나면 밥상이 들어온다. 밥상이 치우고 나면 또 다른 용도로 이용되어야 함으로 온 식구들이 하루에 세 번은 반드시 같은 시간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 흔히 말하는 밥상머리교육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생겼다.

일단 밥상이 방으로 들어오면 부엌과는 공간적으로 단절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리는 한상차림이 발달되었다. 밥상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은 음식이 사람에게로 오느냐 아니면 사람이 음식을 찾아서 가느냐의 측면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집안의 최고 어른이 (체면 없이) 음식을 찾아가는 것 보다는 다소 번거롭더라도 아랫사람이 진짓상을 갖다 드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긴 안목에서 가르쳐야 할 자녀교육에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요즘은 구식이라고 쳐다보지도 않고 까마득해졌지만,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식사 때 조손(祖孫) 겸상은 해도 부자(父子) 겸상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예학(禮學)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임금의 초상을 대신해서 모셔놓은 전패(殿牌)를 손상시키는 전패작변이나 강상죄(綱常罪)가 -

유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도리인 삼강과 오상의 도덕을 해친 범죄- 일어나면 그 고을의 행정단위를 강등시킬 만큼 엄격했다. 여기서도 예외가 된 사건이 있었으니, 황해도에 사는 이동이라는 사람이 부자겸상을 하다가 시비가 생겨 아들에게 맞아 죽은 일이다. 이때 재판관은 겸상을 했던 아버지에게 일차적 책임을 물어 처벌의 수준을 대폭 낮추었다.

예학이 수직적 질서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여성을 억압했다는 문제가 있지만, 자녀교육이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고려해 볼만하다. 부자가 겸상을 하면 자연스럽게 시시콜콜한 간섭이 일어나게 되고, 맛있는 음식은 은연중에 서로 경쟁하는 일이 생겨서 아버지의 권위가 서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가부장 중심의 권위주의식 교육이라며 가볍게 치부해버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세계를 주름잡는다는 유대인들도 식탁에는 아버지 자리가 정해져 있고, 사정이 있어 식사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돌아가신 이후에도 그 자리를 비워 놓음으로써, 자녀들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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